안골태호 2022. 12. 4. 08:52

2022년 11월 18일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며 내면의 심정을 수양하는 내용을 노래한 시조작품으로, 가사 〈면앙정가〉·〈면앙정단가〉와 시조 22수와 한시 520여 수를 짓은 송순의 면앙정을 답사한다.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의 제월봉으로 오르는 높다란 언덕 앞엔 면앙정이라 새겨진 커다란 석비가 서 있다. 마른낙엽이 이불같이 덮여있는 언덕을 올려다보면 면앙정의 기와지붕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송순(1493~1582)은 1533년 자신의 고향인 담양 봉산면 제월봉 오르는 길목에 면앙정을 지었다. 그의 나이 41세. 불혹을 갓 넘긴 시절이었다. 송순은 90세까지 장수했으며 50년 동안이나 관직 생활을 했다. 27세 때인 1519년 빼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관직에 들어갔는데, 그해 겨울 조광조등 사림 개혁파가 훈구파에 의해 크게 화를 입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송순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송순은 1533년 김안로 일파가 조정을 쥐락펴락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내려놓고 담양으로 낙향했다. 그때 면앙정을 지었다. 3년 남짓 자연과 함께 시를 짓고 마음을 다스렸다. 속세를 떠나 숨어 지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1537년 김안로가 사약을 받고 실각하자 곧바로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어 관직에 다시 나아갔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50세인 154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족히 2~300살 남짓한 대형 상수리나무부터 굴참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등 참나무 무리들이 면앙정을 호위하고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윤원형 일파에 의해 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자 송순은 상춘가(傷春歌)라는 시조를 지었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송순은 이 시조에서 희생당한 사림들을 낙화에 비유했다. 눈 밝은 사람이면 거기 담긴 비유와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 노래가 불렸고 그로 인해 송순은 큰 변을 당할 뻔했다. 1550년엔 대사헌,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도리에 어긋나는 주장이나 이론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송순은 1552년 60세 때 면앙정을 개축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었으나 송순은 1569년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1519년에 출사했으니 무려 50년 만이다. 이후 9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송순은 면앙정에 머물며 줄곧 시문과 풍류를 즐기면서 강호가도(江湖歌道 속세를 떠나 강호 자연 속에 묻혀 시가를 벗하고 살던 시인이나 가객들의 한 유파)의 담양 가단을 구축했다.
정자로 올라 가는 계단 옆에는 '면앙정가' 한 구절을 새긴 비가 있다. `넓은 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버렸는 듯/ 옥천산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줄기마다 퍼진 듯이/ 넓거든 길지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 말거나/
1550년대에 송순은 면앙정에서 면앙정가를 지었다. 면앙정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도가적 풍류적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뜻을 풀이 해보면 '신선이 어떤 것인지, 이 몸이야말로 신선이로구나. 강산 풍월 거느리고 내 평생 다 누리면 악양루 위의 이태백이 살아온다 한들 넓고 끝없는 정회야 이보다 더할쏘냐.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자연친화적, 도가적, 풍류적이지만 그래도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며 유교적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세상의 도리를 지킨 것이다.
1552년 송순은 면앙정을 개축했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송순은 이렇게 기뻐했다.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던 바를 이제야 이뤘다. 1552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에 머물면서 면앙정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측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 방을 배치한 정자이다.
'면앙정`편액 16세기 명필 성수침의 글씨로 전해온다.
좌측편액은 면앙 송순의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회방연에서 제자들이 직접 스승의 가마를 멘 일에 관해 쓰라는 정조의 과거시험 시제다.
우측편액은 면앙정의 의미를 실은 면앙정 삼언가다.
면앙정에 서노라면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들녘 넘어 삼인산과 병풍산이 들어 온다.
'면앙정 삼언시'에서 정자의 유래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정자 속에는 크고 넓은 흥이 있네 풍월을 불러들이고 아름다운 산천은 끌어당겨 명아주 지팡이 짚고 가며 한 평생을 보내리라.
송순 그가 살았던 시대는 4대사화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때였으나, 5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그는 단 한번 1년 정도의 귀양살이만 할 정도로 관운이 좋았으며, 이것은 그가 인품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었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고루 사귀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단다.'면앙'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사심도 없고 꾸밈도 없다. 자연그대로의 삶을 추구하는 그의 심성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