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것은 부끄러운 행실이 하나도 없는 것이요, 가장 나쁜 것은 부끄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아예 없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 하니 차마 부끄러워 고개 들 수 없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국의 머시기가 방금 한말을 안했다고? 참 말로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민망한 세상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김주열열사 같은 사람이 나올수 있는 그런 시기이다.
김주열 (金朱烈 1944년 10월 7일 ~ 1960년 3월 15일 )은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학생이다. 묘는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있다.1944년 남원시 금지면에서 태어난 김 열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시민 학생들과 함께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투쟁 중 경찰들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 열사는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쇠사슬로 두 다리를 묶고 쇳덩어리를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던져 수장해버림으로써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근 한 달만인 4월 11일에 최루탄이 눈에 박히고 두 다리가 쇠고랑에 감기고 쇳덩어리를 매단 김 열사의 시체가 마산시 신포동 앞바다에 떠올랐다. 겨우 17세인 고등학교 1학년 입학생이 이러한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에 학생들을 선두로 한 마산 시민들이 김주열을 외치며 다시 들고 일어나 시위가 들불처럼 크게 번지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3.15부정선거 규탄, 선거 무효, 이승만 독재 퇴진 투쟁이 더욱 거세게 타올라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역사적인 대변혁이 일어났다.몸을 던져 민주화 시대를 열었던 김 열사의 의로운 정신이 국민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남원시 금지면에 추모관이 세워졌다. 추모관 안에는 김 열사의 사진과 그가 살아온 기록들이 전시돼 있으나, 추모관과 전시관은 시청 담당부서의 담당자와 통화를 하여 비밀번호를 안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추모관 전시관은 김주열 열사의 사진과 그가 살아온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김주열 열사의 희생과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김주열 열사는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김주열에게 최루탄을 발사한 마산경찰서 박종표 경위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묘지에는 金朱烈之墓 비석과 열사 김주열의 묘 라고 한글로 새겨진 묘비석이 있고 깨긋하게 관리된 묘비에는 김 열사가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공적 내용이 새겨져 있다.역사의 물결을 돌렸던 김 열사의 고귀한 뜻,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면 예우와 대접 등이 크게 미흡한 것 같아 아쉽다. 역사적 인물로만 박제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불의하고 부정의하고 불합리한 요즘같은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는 김 열사의 정신과 뜻이 시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어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