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여행

낙안읍성

안골태호 2023. 4. 19. 09:16

2023년 4월 7일

순천드라마촬영장에서 다음 여행지로 계획한 역사와 민속 그리고 생태가 어우러진 순천 낙안읍성에 도착을 하였다. 순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대한민국 3대 읍성 중 하나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및 CNN선정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된 곳이다. 이곳도 수차례 방문하였던 곳이며, 특히 금전산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낙안읍성의 전경 그리고 읍성안에서 유유자적 걸어다니면 과거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 곳이다.

 

 

 

낙안읍성 성곽의 길이는 남북 약 310미터, 동서 길이는 남쪽에서 약 460미터, 북쪽에서 약 340미터로 성벽의 둘레는 약 1,410미터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4~5미터, 면적은 약 13만 5,360제곱미터다.

 

4,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낙안읍성의 동문 낙풍루로 들어가 성안 풍경을 답사하기로 한다.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낙풍루,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 서문은 낙민루라 부르며 북문은 폐쇄했다.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이 성문을 감싸고 있다.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역사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다.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세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초가집이 늘어선 골목길을 요리조리 들어서면 낙안객사가 나온다. 조선시대 건물로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예를 올리고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던 건물이다.
동헌 앞에 있는 낙민루는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 불리우고 있다.
낙안읍성 동헌은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해당한다.
서문방향으로 가다보면 낙안읍성 마루방집이 나오는데, 중요 민속자료 제95호로 낙안읍성의 동서를 잇는 큰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초가집이다. 19세기에 건설되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깊숙한 자리에 안채는 서쪽부터 부엌, 안방, 마루, 작은방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집의 특징은 갈고리를 연상하는 듯한 구조물이 도리와 뜬 도리에 의지해 설치된 것이다. 이는 마을의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다.
낙안읍성 서문의 전경이다. 서문에서 좌측으로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낙안읍성의 최고 전망지가 나오니 꼭 이곳으로 가야 한다.
초가지붕이 버섯처럼 보이는 낙안읍성 촬영 최적의 장소로 성곽이 일자로 쭉뻗어 있으며 남문도 보인다.
낙안읍성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초들로 이는 거의 모든 주택이 초가집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집들은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一자형 가옥으로 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부엌, 큰방, 작은방 등 3칸이 나란히 배열된 초가삼간이다.
낙안읍성 남문 쌍정루의 모습이다. 이곳 성곽에서 내려가 큰샘을 찾아간다.
남내리 골목 안에 있는 천연 우물 큰샘 또는 미인샘이라고 하며 원님이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예로부터 이 물을 마시면 심성이 고와지고 얼굴이 예뻐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외부에서도 많은 사람이 떠가는 명수다.
중요 민속자료 제98호인 최선준 가옥은 낙안읍성 남문 가운데로 뻗은 큰길에 접해 있는 첫 번째 초가집이다. 방물을 파는 소규모 좌판을 둔 상점 주택으로 활용했다. 이 집은 성벽을 이용해 뒤뜰을 조성하고 성벽 위에 장독대를 두기까지 했다.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관아와 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담장은 2.5미터 높이로 여타 담장보다 높게 쌓았으며, 주변에 연지(늪)를 두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는 장애물로 이용했다.
그럼에도 옥사가 굳이 주거지 속에 있는 이유는 주민들을 상대로 교육장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단다.
낙안읍성은 T자형 간선로를 제외한 길은 자유 곡선형의 좁은 골목길이다. 주택들은 대부분 좁은 골목길에서 연결된다.
담은 높이가 대체로 눈높이 정도이지만 남북로에 면한 집들의 담은 처마 아래까지 빈틈없어 길에서 집 안이 조금도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고리형 길과 막다른 골목들은 그물처럼 연결된 미로 같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성벽 외곽에 부분적으로 해자를 설치했다. 성곽 주변에 땅을 파거나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해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기능을 지닌 시설물이다. 낙안읍성의 해자는 넓이 3미터, 깊이 1.5~2미터 정도로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낙안읍성은 다른 전통 마을보다 정겹게 느껴지는데, 건축 소재를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해 집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둥글둥글한 모양이 우리 서민들의 심성을 나타내는 것 같아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낙안읍성 남문 앞에는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다.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은 故한창기 선생님이 생전에 모아오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광복 이후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우리 '토박이'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故한창기 선생님은 생전에 우리 것의 낡음과 투박한 것에서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셨다. 보잘것없고 천대받던 것들이 지금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 되고, 조상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재탄생 되었다.
동국정음. 훈민정음. 월인석보
임경업장군 초상화.
한창기(1936년 11월 11일~1997년 2월 3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출판언론인이며, 1954년 순천중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1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지사인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설립했다.
이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도입하고 마케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 3월,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앞세운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했다. 한때 정기구독자가 6만 5000명에 달할만큼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했으나 1980년 8월 계급 의식과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폐간당했다.
1984년 다시 샘이깊은물을 창간했다. 잡지와 책을 통해 한글의 꼴과 쓰임을 다시 디자인했으며, 판소리 음반, 칠첩반상기 제작, 민중자서전 출판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의 토박이 문화를 대중에게 소개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물관 공터에 조성된 석물공원으로 한창기 선생님의 우리문화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또 박물관 옆에는 백경 김무규선생의 한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