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도산에서 서악동으로 내려오는 산기슭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중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삼층석탑, 도봉서당과 주목하지 못했던 주변의 고분군(사적 142호)를 둘러 본다.
태종무열왕릉 옆 선도동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조선 성종 시기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불권헌 황정을 기렸던 도봉서당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이 서당은 숭앙문·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상허당 등 건물이 있으며, 일종의 서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도봉서당)은 정면 5칸·옆면 1.5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옆·뒷면에 쪽마루를 둘렀다.도봉서당 바로뒤로 삼층석탑과 왕들의 묘가 보인다.보물 `서악동 3층 석탑`은 높이 5.1m, 기단 너비 2.34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는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모전탑계열에 속한다. 모전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이다.왕릉 초입에 울타리로 보호하고 있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물로 여겨온 `서악동 바위 구멍` 유적지도 볼 수 있다. 서악동 바위구멍' 또는 성혈 바위라고 불리는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땅 위에 넓게 퍼진 너럭바위에 500여 개의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질 형태가 아닌 인위적으로 조각한 구멍으로 추정된다.첫번째 고분의 주인공은 헌안왕릉이라 전해지지만 확실치 않다.문성왕릉진지왕릉(추정)진지왕릉 뒤로 신라 24대 진흥왕릉(추정)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진지왕이다. 진지왕의 조카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이다.진흥왕릉을 끝으로 좌측으로 내려오면 고분들이 줄지어 있다. 조선 후기 경주 김씨 가문이 세를 불리게 되면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적당한 고분을 선정해 비정한 명칭들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삼층석탑 좌측언덕으로 고분들이 있으며, 서악동 마을 건너에 능들이 1열로 도열하고 있다.서악산을 배경 삼아 줄을 서듯 일렬로 배열해 있는 그 모습이 도심에 위치한 고분군과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서악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이곳의 주인공들이 온전히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맨 앞에 자리한 주인공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2,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무열왕릉 건무문으로 들어갑니다.대부분의 신라 왕릉들은 묻힌 왕과 왕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태종 무열왕릉의 주인은 확실하다. 바로 앞에 그 주인을 가리키는 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비석의 몸체는 소실되었지만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과 태종 무열대왕 지비가 새겨진 이수(비석의 머리)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이 비석은 문무왕 시기 명필가로 유명했던 그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작성했다고 전해지며,거북 조각의 표현기법이나 조각 기술을 측면으로 살펴보면 가히 신라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이수에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는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며, 다리, 용의 비늘 하나 하나가 조각되어 있다.이수 중앙에는 김인문 (무열왕의 둘째아들)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로 양각되어 있다.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김인문 묘 앞에는 조금 작지만 거북이 모양의 비석 받침이 남아있다. (보물 경주 서악동 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