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서울 여행

창경궁. 창덕궁

안골태호 2025. 5. 5. 14:57

2025년 4월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창경궁은 조선 시대 왕실의 생활과 정원이 어우러진 고궁으로,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으며, 창경궁은 성종 대에 창건된 궁궐로, 왕과 왕비의 일상 공간이었던 생활 중심 궁궐이라는 점에서 다른 고궁들과 차별화된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종묘를 관람한 후 종묘 북신문에서 나오면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위치한 율곡로 궁궐 담장길 쪽 출입문이 보인다.
국보 '동궐도'(東闕圖)는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으로 가로 길이가 5m를 넘는다.

 

관천대(보물)는 ‘소간의대’ 또는 별을 관측하는 대라 하여 ‘첨성대’라고도 알려졌다. 지금은 소간의는 없어진 채 돌대만 남아 있다.
관천대 앞에 창경궁 명정전 행랑이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에서 부터 관람을 하기로 한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홍화'는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라는 뜻이다.
옥천교는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옥천교는 궁궐에 남아 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와 정면에 보이는 돌다리 옥천교를 건너면 명정문이 나오고,
감히 왕의 길 어도를 걸어 명정전으로 향한다. 원래는 성종 때 처음 지었지만 임진왜란과 순조 30년 대화재를 겪으며 소실되고 재건하기를 반복해 현재는 광해군 때 재건한 이 두 건물이 창경궁 전체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창경궁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는데,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단층의 아담한 규모로 조선 전기 궁궐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가장 오래된 조선 궁궐 단청이 남아있다. 명정전 가운데에는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고, 그 뒤로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이 설치돼 있다.
400여년이 넘는 명정전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명정전 좌측에는 사도세자의 참극이 있었던 문정전 후면이다.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그러나 편전 외에 왕실의 장례 때 혼전(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에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다가 198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문정전 좌측으로 숭문당은 창경궁 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 이  신하 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 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문정전 이나 일상적으로는 숭문당을 더 많이 활용했다.
빈양문은 명정전의 후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정전의 후문 기능을 넘어 창경궁 내 합문 역할을 했다. 합문이란 궁궐에서 행사시 공적 공간 과 사적 공간의 경계로 설정된 문을 말한다
빈양문을 나서면 함인정이 나오는데, 함인정은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으며, 그 뒤로 경춘전과 환경전이 있다.
`경춘전`은 1483년(성종 15)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현왕후 민씨(숙종 두 번째 왕비), 헌경황후 홍씨(혜경궁, 정조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왕세자빈의 생활 공간으로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환경전`은 왕이나 왕세자가 생활하던 내전 건물로 보인다. 환경전은 창경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창경궁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물러나신 상왕 태종대왕을 모시고자 따로 지은 궁궐 수강궁 터에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대왕이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 세 분의 대비를 따로 모시고자 그 터를 포함해서 크게 확장하였다.
`영춘헌`과 `집복헌`은 창경궁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보인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영춘헌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1800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복헌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며 내전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다. 통명전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다. 통명전 서쪽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에서 용마루가 없는 유일한 건물이다. `양화당`은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창경궁 전각마다 사연이 깊고 발길 닿는 곳마다 묵직한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궁궐을 한바퀴 돌고 나면 다 잊은 줄 알았던 역사의 장면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영춘헌 좌측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우측으로 춘당지로 가는 길가에 보물 `풍기대`가 있다. 풍기대는 바람을 관측하기 위하여 세모꼴 깃발을 매달던 깃발대이다.
춘당지로 가는 길은 영산홍이 관람객들을 반긴다.

 

조선 시대에 `춘당지`는 왕이 농사를 짓는 의식을 하며 풍년을 기원했던 논밭인 '내농포'가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를 유원지로 만들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한 상태다.

 

양화당 뒤 언덕에 `자경전 터`는 창경궁의 대비전이다.‘자경(慈慶)’ 뜻은 `왕의 어머니 가 복을 누린다’라는 뜻이고,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헐어서 자미당으로 지었다. 이후 다시 짓지 않았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의 `함양문`이다. 지금부터는 창덕궁으로 들어가 궁궐을 관람하겠습니다.
함양문 좌측으로 중화당터 뒤로 `낙선재`는 비공개 구역이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건물이다. 1847년 헌종 시기에 건립되었으며,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이 깃든 곳이자,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들이 머물렀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창덕궁 성정각 내 보춘정과 그 뒤로 관물헌이 보인다.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이며, 우측으로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이다.,
보물인 희정당은 '밝은 정사를 펼치다'라는 뜻을 지닌 궁궐 전각이다. 본래 침전으로 사용했다고 하나, 조선 후기부터는 선정전을 대신해 업무 보고, 국가 정책 토론 등이 열리는 왕의 집무실로 쓰였다.
1917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복원하였는데, 이때 내부를 쪽매널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입구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어 전통 건축 방식과 근대적 요소가 함께 남아 있는 점이 특징이다.
희정당 뒷편에 보물로 지정된 창덕궁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현재 공사중이다.
선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이다.
이곳에서 조정 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선정전은 임진왜란을 거쳐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옮겨 지었는데,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전 앞 광장이며, 우측으로 창덕궁 인정전 회랑이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우측 숙장문으로는 창덕궁 후원및 희정당, 낙선재, 성정각 등 권역 및 창경궁으로 가는 문이다. 특이 한 것은 진선문 안으로 발을 들이면 박자청(태종 때 궁정 건축가)의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사다리꼴 형태의 인정문 앞이 펼쳐진다. 통로처럼 텅 빈 이 마당은 왕의 대관식 등을 했던 중요한 공간인데 자세히 보면 찌그러진 네모, 즉 사다리꼴 형태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 외관은 2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의 형태다.
천장 중앙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봉황 목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공간의 권위와 화려함을 극대화하고 있다는게 국가유산청의 설명이다. 또한 인정전 내부 깊숙한 곳에는 왕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그 뒤편에는 왕이 다스리는 세계를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가 있다.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인정전을 수리하면서 전등·유리창·커튼이 설치되고 바닥이 전돌(흙으로 구운 벽돌)에서 마루로 교체되는 등 근대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전환기의 궁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창덕궁 정전 앞마당 진선문으로 나가서 궐내각사를 둘러 보겠습니다.
창덕궁 궐내각사 입구.
`궐내각사`는 궁궐 내의 설치된 여러 관청을 뜻하며, 국왕 보좌 또는 왕실 업무와 직접 관계된 관청으로 승정원, 규장각, 홍문관, 예문관, 선전관청, 오위도총부, 세자시강원, 세자익위사, 내의원 등이 대표적이며, 궐외각사는 의정부, 육조, 충훈부,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 사역원 등의 일반 관청이다.
규장각은  조선의 왕실 도서관 및 학술연구기관이다.
검서청은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대유재였으며, 책을 교정하거나 책 원본을 똑같이 베끼는 일을 하던 곳이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간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다. 1656년(효종 7)에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 지은 춘휘전을 숙종대부터 선원전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21년에 신 선원전을 후원 깊숙한 곳에 건립하여 어진을 옮겨가면서 이 일대는 폐허가 되었다. 선원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부속건물들은 이때 없어졌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사헌부 · 사간원을 합쳐 양사라고 하는데 여기에 홍문관을 합해 삼사라고 불렸다. 세종 때 주로 경연의 업무를 하던 집현전이 세조 때 사육신사건으로 폐지되었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홍문관으로 부활하였다. 학술 기관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양사와 함께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금천교는 돈화문 앞을 흐르는 금천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돌다리로,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의 대문인 진선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돌다리의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이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세워 통행자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조각하였는데 천록(상상의 동물)으로 짐작된다.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금호문은 창덕궁의 서남편에 위치한 문이다. 돈화문의 서쪽행랑 구역에 위치하여 서행랑문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관람객들은 금호문으로 출입을 하고 있다. 도심 속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고궁에서, 싱그러운 봄 정취를 느끼면서 궁궐의 역사적 의미도 되새겨 보았다.
돈화문은 현재 공사중입니다.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처음 지어졌는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지었는데, 규모는 2층 누각형 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하였고, 신하들은 보통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