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산내면 람천이 휘감아 도는 들판 한가운데에 실상사가 있다. 보통 이름난 사찰은 계곡 깊숙한 곳, 산중턱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기 마련인데 실상사는 그 반대다. 주변 산자락에 들어선 마을이 절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실상사에는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11여 점 등 17(지방문화재 포함)점의 보물급 문화재를 간직한 천 년 사찰로도 유명하다. 넉넉한 정을 품은 지리산과 꼭 닮은 실상사를 관람합니다.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 정기가 일본으로 가 버린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절을 세운 `실상사` 그래서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실상사로 들어가는 해탈교로 향한다. 주차비 무료.실상사 해탈교 주변에는 석장승 3기가 있다. 실상사 쪽에 두 기가 서있고, 다리 건너기전에 하나가 서있다. 이 석장승은 돌벅수라고도 하며, 민중 신앙의 하나로 남원 지방에 널리 퍼져 있다. 절집 앞에 석장승이 서있는 것은 민중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석장승 부근에는 목장승과 솟대도 서너 개가 함께 서있다.해탈교에서는 남쪽으로 멀리 지리산 영봉들이 보인다.실상사는 828년 신라 흥덕왕 때 개창한 국내 최초의 선종 가람이라 자랑한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해 혜능의 남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홍척국사가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아 창건한 사찰이다. 지실사라는 명칭으로 개창한 사찰은 수철화상이 제2대 조사에 오르며 왕실의 후원으로 크게 확장됐고, 고려시대에 조계종 실상산파로 종명을 개칭하며 최대 융성기를 누렸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 들어 사세가 쪼그라들었고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되고 말았다. 절이 보유한 땅은 이후 200년간 민간에서 경작지로 사용했다.산문 역할을 하는 천왕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옛 건물 기둥에 써 붙이는 글귀(주련)는 대개 알기 힘든 한자인데, 실상사 천왕문에는 한글로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는 글귀가 양쪽 기둥을 장식하고 있다. 입구부터 친근감이 느껴진다.김제 금산사, 합천 해인사 등 큰 절의 말사로 명맥을 이어오던 실상사는 1995년부터 주변 경작지를 매입해 5만6,198㎡(약 1만7,000평) 옛 절터를 회복했다. 근래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들어섰지만, 절의 중심은 여전히 작은 전각들이 차지하고 있어 천년 고찰이라 하기에 짜임새가 다소 허술한 것도 사실이다.천왕문을 중심으로 좌측의 전경.천왕문을 중심으로 우측의 전경으로 화려한 여느 절보다 보잘것이 없는 절이다.우선 천왕문을 중심으로 좌측 극락전방향으로 가 본다. 실상사의 오래된 해우소는 '변소 화랑'이 되어 있다.내부에는 불경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실상사 화엄학림 요사채 공양간 건물이 있으며, 그 건너편에 화장실 벽면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씨가 궁금하여 가 본다.종무소 우측에 있는 목조건물의 생태화장실 내부는 청결하고 당연하게 생각했을 냄새도 없다. 이런 화장실에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생태화장실은 똥과 오줌을 분리해서 모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똥을 누고 톱밥이나 왕겨를 한 바가지 넣어주면 암모니아 가스를 분해하여 냄새가 없다. 오줌은 대형 집수조에 모아서 미생물 분해과정을 거치면 맑은 물처럼 투명하고 냄새도 전혀 없는 구조의 화장실이다.화엄학림 좌측으로 극락전 앞에 홍척국사(시호는 증각대사)탑비(보물 제39호)가 서 있고, 왼쪽으로 돌아 뒤로 좀 가면 극락전 왼쪽에 홍척국사탑(보물 제38호)이 숨어있다. 탑비에서 잘 안보여 처음 가는 사람들은 이 승탑을 찾으려고 좀 헤맨다.홍척국사(시호는 증각대사)탑비(보물 제39호)는 홍척국사탑의 내력을 설명하는 비석이다. 현재 몸돌(탑신)은 없어지고, 머릿돌(이수)과 받침돌만 남아있다. 받침돌의 거북이 머리는 대개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 비는 거북이 머리 그대로 조각되어 아주 희귀한 작품이다.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에는 세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짝 씩의 문을 달았다.극락전 내부에는 고려시대 말기에 쓰인 사경 ‘상지 은니 대반야바라밀다경’이 발견된 실상사의 ‘건칠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건칠은 흙으로 불상 형태를 만든 뒤 옻칠과 삼베를 10여회 붙인 후 흙을 제거해 만드는 불상 조성의 한 기법을 말한다.극락전 왼쪽에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이 서있다. 홍척국사는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년) 때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826년(흥덕왕 1년)에 귀국했다. 그는 구산선문 중 최초의 산문인 실상사를 창건했다. 그의 입적연대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며, 이 승탑 또한 그때쯤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탑명은 응료탑이다.극락전 바로 오른쪽에는 수철화상탑(보물 제33호)이 서있다. 수철화상은 홍척국사의 제자이고, 실상산문의 2대 조사이다. 화상이 893년에 77세로 입적함에 따라 진성여왕은 수철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탑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 승탑은 목조 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하게 따랐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수철화상탑에서 정원을 가로질러 10여 미터 오른쪽에는 수철화상탑비(보물 제34호)가 서있다.수철화상탑비에는 화상의 출생에서 입적 및 탑을 만들게 된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푸른색(지금은 검은 색으로 보인다) 화강암 비석은 손상된 부분이 많아 완전하게 해석하기는 힘들다. 비석의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다시 천왕문으로 되돌아와서 종각과 우측으로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파편으로 쌓은 ‘옛기와탑’을 보고 있다.보광전 앞 쌍둥이 3층 석탑(보물)과 석등은 창건될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보광전을 마주보고 나란히 있는 두 탑은 보물인 실상사 동서삼층석탑이다. 특히 왼쪽 삼층석탑은 상륜부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탑인데,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구할 때도 바로 이 탑의 상륜부를 참고해서 만들었단다.대웅전 역할을 하는 보광전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석등 앞에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은 돌계단이 놓여 있다. 석등에 불을 켤 때 올라가던 계단이라고 한다.현재 절의 중심을 잡고 있는 보광전은 1884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실상사는 철불과 석탑만 논바닥에 방치돼 오다가 숙종 16년(1690) 대적광전을 비롯해 36동의 건물을 중창하며 실상사는 다시 대가람의 면모를 갖췄다. 하지만 1883년과 1884년 잇단 화재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됐다. 두 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현재 일부만 남아 있는 전각과 탑등 조용하면서 아담한 경내가 한가한 여유를 느끼게 한다.신라시대 철불이 봉안된 약사전 약사여래가 모셔진 전각도 약사전이다.명부전실상사 목탑이 있던 자리에 소박하게 돌솟대를 세워 놓았다.실상사에서 찻길로 5㎞ 정도 떨어진 백장암은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문파를 이뤄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사찰이다.백장은 8세기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설파한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 이름이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규칙을 정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실상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뿌리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에 의해 9산선문 중 최초로 문을 연 곳이다. 이때 실상사의 부속암자인 백장암도 함께 건립했다고 한다.백장암에는 국보 1점, 보물 2점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이형석탑이다. 이형석탑이란, 기존의 석탑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천인상, 십이지신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해 화려하게 장식한 석탑이다.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은 섬세한 연꽃무늬 조각이 돋보이는 문화재다. 삼층석탑과 나란히 있으며 동일한 시기에 세워졌다. 참고로, 보물 제140호인 '백장암 청동 은입사 향로'는 현재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