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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행

월남사지

2021년 3월 24일

몇 년 전 월출산 등산 후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답사하러 왔으나, 월남사지 삼층석탑 해체 보수 관계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는데, 2020년 2월경 보수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 개방을 하여, 다시 답사를 하러 왔다. 위치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마을에 있다. 강진의 월남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월남사지는 어떤 이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도 그 자리에는 사찰이 있었음을 대변하는 석탑이 남아 있고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월출산 경포대탐방지원센터로 들어 가기전 우측으로 월출산 남쪽 평지에 월남사지 터 가 자리하고 있다. 전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민가들이 들어서 있던 걸 발굴 조사하여 복원을 하였다. 건물터로 보이는 기단부와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절터 안의 백제계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법당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과정 중에 현 모전석탑 서측(向左)의 민가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는데, 현 석탑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월남사지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월남사지 안내도

 

사진은 후지타(오른쪽)가 1938년 4월 전남 강진 월남사지를 방문해 찍은 유리원판을 복원한 모습. 후지타는 일제시대 조선의 문화재 발굴·관리를 총괄했던 인물이다. < 성균관대박물관 제공 >

 

월남사지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로 등록 되어 있으며, 월남사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승 진각초창 유이규보비(高麗僧眞覺初創有李奎報碑)’라 하여 송광사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시대 임진· 정유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그 뒤 복원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17세기 중반 이미 폐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298호이며, 이 탑은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월남사지에 남아 있으며 멀리 월출산 천왕봉을 뒤로 하고 과거 법당이 있던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민가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석탑의 옥개석 부재는 이 탑과 쌍둥이 탑으로 조심스럽게 생각이 든다. 북쪽 가까이 언덕에는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보물 제313호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비가 남아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현 삼층석탑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월남사지석비(보물 제313호)가 있다. 이 비는 이규보가 비문을 지은 진각국사비로, 현재 비신 일부가 완전히 떨어져나간 상태이나 기단부의 귀부(龜趺)는 완전하게 남아 있다.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가람배치 형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뿐이다. 그중 기와류는 문양·태토(胎土)·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를 이룬다. 자기류도 완·접시·병·대접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들이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 씨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송광사 16 국사 중 제2대 조이다.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석비는 풍상에 마멸되고 훼손되어 비신 일부와 귀부만 남아있고 이수는 없는 상태이다. 마멸로 인해 전면에는 전혀 판독이 불가능하고 옆면은 비어 있으나 비음에 지금 3.3cm 정도의 글자 30행 600여 자가 남아 있어 당시의 명신 최항(崔沆)의 이름이 확인되며,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이규보가 지었다고 전한다.
진각국사비는 월남사를 창건한 이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고종왕 37년(1250년)에 세웠고, 당대 어릴적 신동으로 불리며 ‘동국이상국집’ 등의 저서를 남겼던 이규보(1168-1241년)가 지었고 글씨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 탁연이 왕명을 받들어 썼다. 이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린 형태로 머리는 용머리에 구슬을 머금은 형상이다. 비의 전면은 떨어져나가 내용을 알수 없으나 뒷면은 상당한 부분이 남아있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에는 "승과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師)가 처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대석과 귀부는 한 돌이며, 귀부는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 들고 네 발의 발톱이 단단히 짚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고 머리, 목 등 세부의 생동감 있는 표현과 전체적인 균형이 잘 어우러져 한층 강렬한 사실적 조각기법을 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의 전체 높이 3.58m, 비신 높이 2.6m, 너비 2.3m이다.

정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보기 드물게 큰 절이었다는 것을 두루 짐작케 하는 드넓은 절터와 큰절이 아니면 없을 법한 웅장한 3층석탑, 그리고 왕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며 왕명으로 그 비가 세워지기까지 창건에서부터 폐사까지 참으로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을 월남사의 자취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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