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는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이분의 생가를 찾아간다.
해남읍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삼선면 봉학리 마을회관에서 100여미터 위쪽에 위치한 김 시인의 생가. 시인의 집은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아 집을 지었다.김남주시인의 생가에 들어서면 상징 같은 굵은 뿔테 안경을 쓴 그의 흉상과 여러 시비들이 맞는다.김남주의 시 '자유', '사랑은'을 새겨놓은 시비와 그 뒤로 대나무숲이 조화롭다.시비들 사이로 보이는 시인의 생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건물이 있다. 흰색으로 칠해진 이 투박한 건물에는 앞쪽으로 난 작은 창에 철막대기들이 몇 개 설치되어 있다. 김 시인이 살던 감옥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같은 감방에서 김 시인은 근 10년을 보내며 결국 병을 얻었다.김남주의 '가장 따뜻한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시비.김남주는 1945년 전남 해남군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삼화초등학교, 해남중을 거쳐 호남의 인재들이 다니던 광주일고에 들어간 그는 부모님과 가족들의 기대를 잔뜩 받았지만, 획일적인 입시교육에 실망해 자퇴했다.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 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진혼가'등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 연구소' 등을 결성하기도 했다.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 구속되었으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0년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남긴 470여편의 시 가운데 300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이며, 그의 옥중시는 80년대 한국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1988년 1월 가석방 되어 출소한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 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작고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출소후 해남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시인으로 생활하던중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등이 있다. 그는 가족, 특히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자신의 심정을 <그러나 나는>에서 다음 같이 노래했다. 그러나 나는 / 면서기가 되어 /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하는 금판사가 되어 / 문중의 자랑도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다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한 곳 / 착취와 억압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이하 생략).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박정희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이다. 박정희의 심복의 심정이 그러했으니, 민주화운동 세력, 특히 인혁당의 동지들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김남주는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으로써 그의 소회가 남달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