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도 여행

정지용 생가

2024년 11월 23일

충북 옥천은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옥천구읍은 누가 뭐래도 ‘향수’로 대표되는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다.

 

 

 

육영수 생가에서 향수길을 따라 정지용 생가 방향으로 가다보면 옥천향교가 보인다.
1398년(태조 7)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중에 소실되었다가 그뒤 중건되었다.
정문 누각처럼 지은 명륜당의 아궁이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2층 방바닥에 매달려 있는 모양인데, 실제 불을 때도 화재의 위험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사당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구읍의 골목과 상가에도 정지용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향수미용실’ 옆 고깃집에는 ‘얼룩백이 황소’ 그림이 손님을 부르고, 담배 가게 처마 밑도 그의 또 다른 작품 ‘오월소식’이 까치 그림과 함께 장식하고 있다. 담장과 골목마다 바다, 바람, 별똥, 춘설, 조약돌, 피리 등 서정 깊은 시어로 가득 찼으니 시인이 있는 마을은 얼마나 풍성한가.
옥천전통문화체험관과 정지용생가 사이에 있는 옥주사마소 옥천의 옛 지명을 딴 옥주사마소 역시 옥천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사마소는 조선시대 사마시에 합격한 지방 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옥주사마소는 전국에 3곳 남은 사마소 중 유일하게 본래 자리에 남아 있는 사마소다.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해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박한 한옥에 불과하지만, 옥천 유림의 정신이 깃든 건물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실개천 옆에 초가로 복원한 정지용 생가가 있다. 당시 한약방이었던 생가는 실개천(지금은 석축으로 말끔하게 정비해 ‘실개천’이 주는 정감을 느끼기 어렵다)의 범람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집과 가산은 대홍수때 떠내려가면서 가난해지고 부모직업란도 농업으로 바뀐다.
생가의 초가지붕 이엉갈이가 한창이다.
사립문 안으로 붉은 감나무는 낙엽은 다 떨어지고 누런 감이 반기고, 두 채의 초가집 앞마당엔 피리부는 소년을 태운 황소 조형물이 서있다.
생가 바로 옆은 정지용문학관이다.
문학관 앞 뜰에는 여러 조형물들이 있으며,
정지용은 1920년대~1940년대에 활동했던 최고의 시인으로 신인 등용문인 ‘문장’ 추천위원을 하면서 윤동주,박목월,조지훈 등 후배들의 길을 터주었다. 복권 후 1989년부터 시작된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는 박두진,김광균,오탁번,유안진,정호승,김지하,도종환,나태주,신달자,김남조 등으로 쟁쟁하다.
건물로 들어서면 전시장 입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 정지용이 벤치에 앉아 있다. 관람객이 기념사진을 찍는 일종의 포토존이다. 1929년 스물일곱 나이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한복 입은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민족 말살에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였음을 감안하면 교사 신분으로 쉽지 않은 차림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반일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정지용문학관 내부는 그의 대표작 '향수' 전시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서정성 짙은 사진과 시어로 꾸며 놓았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 이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불온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월북 시인이라는 누명으로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연구자들조차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정○○’ ‘정X용’으로 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옥천구읍에 그의 문학관이 들어서고 생가가 복원된 것도 뒤늦게나마 자진 월북이 아니라 납북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 당국에 의해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됐다가 평양의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또는 그 직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수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48년 짧은 생은 고난과 우여곡절로 얼룩졌지만 그의 작품은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시어로 남아 있다. 전시관은 그의 대표작 ‘향수’에 대한 헌정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사진과 함께 전시된 시어 하나하나가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충청도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안 백화산  (2) 2025.04.14
서산 유기방 가옥  (3) 2025.04.13
육영수 생가  (1) 2025.01.01
옥계폭포  (2) 2025.01.01
노근리평화공원  (2)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