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에 맞서 개화정책을 펼친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있었다.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성향으로 굳혔다. 1895년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로 여겼던 명성황후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군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와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시해하였다.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 여주시 명성로 71에 위치하고 있다.명성황후 생가는 동절기(11~2월)에는 오후5시, 하절기(3~10월)에는 오후6시까지 개방하며 개장 시간은 오전9시로 동일하다. 입장료는 없고, 주차비 1,000원.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명성황후 기념관과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좌), 명성황후 추모비(우)가 위치하고 있으며, 기념관 우측으로 161석 규모의 공연장인 문예관이 있다.기념관 로비 벽면 타일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기념관에는 명성황후 편지, 고종 어필 편액, 여흥 민씨 족보 등 137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명성황후 연표는 19세기가 얼마나 격동의 시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됐던 1866년 병인양요, 첫 원자를 출산한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남편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다. 이어 일어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은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준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결정은 최악이었다. 결국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이듬해인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명성황후(1851~1895년)는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제의 침탈에 온몸으로 저항한 ‘조선의 국모’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남편인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권력욕의 화신’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일제가 1895년 10월 경복궁으로 자객을 보내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도 명성황후야말로 일본의 조선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1885년 정월 보름에 쓴 명성황후의 글씨는 큼직하고 시원하다.고종, 순종이 기억하는 명성황후 등 시간에 따라 명성황후의 삶과 인간미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명성황후의 친필과 왕비 어보, 을미사변 때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생애를 재현한 디오라마 등 당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조선 말기 문신인 민치록의 딸로 태어난 명성황후는 1851년에 태어나 8세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 집은 본래 조선 제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1687년(숙종13)에 건립되었다.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한 칸 규모로, 대문간 양쪽에 방과 창고가 있다. 행랑채 오른쪽에 별동으로 변소가 있다.사랑채는 안채와 이어지는 중문간 안으로 들어가면,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룬것을 볼 수 있다.사랑채 좌측으로 안채의 뒤란에는 장독대와 변소가 있다.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마당이 좁다.안채 뒷뜰.사랑채 방과 안채 마루광 사이, 그리고 사랑채 부엌과 변소 사이에는 협문을 설치한 담을 쌓아 별당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였다.생가를 빠져나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가 나온다.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41년(1904년)에 세운 이 비석은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에 우뚝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1904년 5월 어느 날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뜻의 한자어가 적혀 있는데 황후의 아들이자 조선의 27대 임금인 순종의 친필이라고 한다.민유중 묘로 올라가는 길 옆에 신도비가 있다.명성황후 생가에서 감고당으로 가는 길.명성황후 생가와 감고당 사이에 민가마을.민가마을에는 주막과 한복 체험 및 전통 소품을 살 수 있는 상점 등이 있다. 마치 자그마한 민속촌 같다.감고당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으로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진 뒤 철거위기에 놓이자 2006년 명성황후 고향인 현재 위치로 행랑채 2동을 원형 그대로 이전했다.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 본인이 폐위되고 거처한 곳이기도 하고 명성황후가 8세 이후 왕비 간택 전까지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감고당(感古堂)이라는 이름은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가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해 붙였다고 전해진다.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제26대 고종의 왕비였던 명성황후가 태어난 집으로, 고즈넉한 한옥과 정원이 잘 보존돼 있다. 역사적 배경과 함께 조선 후기 상류 주택의 구조를 관찰할 수 있는 국가유산으로, 여주의 대표적인 역사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