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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서울 여행

여주 신륵사

2025년 8월 26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자리한 천년 고찰로, 고즈넉한 절집과 석탑, 강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어우러진 곳이다. 꾀 오래전 그러니까 십수년 전에 여주도자기축제 때 방문한적이 있는 신륵사 강헌루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던 한가로움이 진하게 회상된다.

 

 

 

최근에 신륵사관광지'와 '금은모래강변공원' 부근을 잇는 '여주남한강출렁다리'는 한강 물줄기 위에 놓인 최초의 출렁다리다. 출렁다리는 길이 515m, 너비 2.5m, 주탑 높이 48m, 평균 높이 25m 다.
남한강 출렁다리는 하절기(3~10월)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입장 마감 5시 30분)까지 운영하나 6월 말까지는 공휴일 및 주말에 한해 오후 9시(입장 마감 8시 30분)까지 통행이 가능하다.
철망 구조물로 된 바닥 아래로 남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아찔한 높이의 출렁다리와 달리 남녀노소 무리 없이 오간다. 성인 1200명까지 동시 통행이 가능한 남한강 출렁다리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출렁거림이 심해지고, 강바람까지 더해질 경우 좌우로 흔들리는 ‘스윙 현상’이 나타난다.
스릴보단 풍경에 취한다. 중간 지점에 이르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좌 신륵사, 우 금은모래 강변공원(금은모래 캠핑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 위로 황포돛배 모양의 관광 유람선까지 떠 가면 한 폭의 산수화다.
출렁다리가 ‘핫플레이스’라고 해도 이 구역 주인공은 단연 신륵사다.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 여강의 물길이 감싸안은 강가에 자리해 예부터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 학자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해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극찬했다. 고려 말 명승 나옹선사가 머문 곳으로 관련 이야기와 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마음 편히 걷다간 깜짝 놀랄 포인트가 있으니 주의할 것! 별안간 ‘빠지직’ 유리 바닥이 깨지는 굉음과 함께 발아래 LED 유리 바닥이 갈라지는 특수 효과가 있는 구간에선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여주 구간 남한강은 여름에는 황강(黃江), 겨울에는 여강(驪江)으로 불렸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의 ‘여강미회(驪江迷懷)’에서 ‘여강의 한 굽이 산이 마치 그림 같아, 절반은 수채화 같고 절반은 시와 같네’라고 처음 표현했다고 한다.
강 언덕에 영월루(迎月樓)가 있다. ‘달을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여주관아의 정문이었던 영월루는 일제강점기 때 서양식 건물로 바뀌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흔들다리 효과는 두근거림이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의미 하며, 출렁다리 위에서 아찔한 긴장감이 사랑의 감정으로 고조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답니다.
여주는 도자의 고장으로서의 역사가 고려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600여 개의 도자 공장이 있다고 한다. 사찰과 도자 시설이 함께 동거하고 있다. 도자기 유통센터에서 느긋하게 구경하며 신륵사까지 걸어가는 것도 묘미가 있다.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 광장
여주 세계도자기엑스포 전통가마불지피기
원호 장군이 여주 남한강에서 도강하려는 왜군을 무찌른 것을 기리는 임진전승비 가 신륵사 일주문 앞에 보인다.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을 지난다. 신륵사는 나지막한 봉미산 끝자락 남한강가에 접해 있어 풍광이 빼어난 곳으로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다.
신륵사 사적비와 공덕비.
대가집 긴 행랑채를 떠오르게 하는 신륵사 불이문. 신륵사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전설이 있다. 아마도 남한강의 거센 물결(용마)를 잡기 위해 창건한 절이었지 않나 싶다. 세종의 능(영릉)이 서울 내곡동에서 여주로 옮겨오면서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덕분에 확장되면서 사찰명이 보은사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며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에 신륵사라는 본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보제루
범종각과 구룡루가 일렬로 보인다.
신륵사 구룡루
구룡루를 지나니 신륵사 중심 법당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극락보전 앞에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이 있다.
8~9층 정도 되지만 원형이 몇 층인지 잘 몰라 다층석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비율이 길쭉하고 다층임에도 높이는 3m쯤으로 아담한 축에 든다.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된 성종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보전 그 안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불의 상체는 길쭉하며, 옆에 협시 보살의 머릿결은 길게 허리까지 내려오는 등 독특하다.
신륵사의 자랑거리는 대웅보전의 뒤편 구역에 있다. 분명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인데 지붕이 화려한 다포양식이고, 앞마당에는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심은 600년이 넘은 향나무가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이 건물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를 모셔 놓은 조사당이라 불리는 건물로 불단 중앙에는 지공 화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무학대사와 나옹 화상의 영정이 있다.
세 분은 스승과 제자이며 조사당 중앙에 목조상은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 상이다. 나옹선사는 사대부들의 모함으로 탄핵되어 밀양의 영원사로 가게 되었다. 가던 중 병이 나서 이곳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나옹에게 법을 전한 지공화상, 나옹에게 법을 이어받은 무학대사까지를 일컬어 삼화상(수행을 많이 한 고승)이라 칭한다.
조사당을 등지고 언덕길을 올라가니 나옹선사의 부도탑과 탑비가 있다.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제자 무학대사가 스승을 모신 곳인지라 명당일 듯하다.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동그란 사리탑인 ‘보제존자 석종’, 석종 앞에 사리탑을 밝히기 위한 석등, 석종 옆의 넙적한 '보제존자 석종비'도 보물이며, 목은 이색(1328~1396)이 나옹의 사리 석종기를 썼다.
나옹선사의 부도탑에서 내려다본 전경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선시다. 스무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한 마음에 지은 시다.
조사당 좌측 언덕에는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과 팔각원다형석조승탑 등 두기의 석조 불탑. 사리탑이 있다.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는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구성된 정자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부도이다.
조사당 우측으로 지장보살, 염라대왕 등이 자리한 명부전.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염라대왕 등 시왕을 모셔 놓았다.
명부전 우측으로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혼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으로 `봉송각`이라 한다.
신륵사에는 600년 이상 된 보호수가 세 그루나 있어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세심정에서 강변 방향 오른쪽에 높이 22m의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와 32m의 600년 된 참나무 보호수 등 두 그루가 나란히 있다. 은행나무는 먼 옛날 나옹선사가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갖은 소망을 적은 쪽지가 많이 매달려 있다.
나무사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관세음보살이 나투신 듯한 희유한 모습으로 자라났으며 또한 관세음보살님이 대자대비로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발원으로 신륵사 은행나무에 나투신(깨달음이나 믿음을 주기 위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 처럼 보인다.
은행나무 옆을 지나 몇 계단 오르니 10m 높이의 신륵사 다층전탑(보물)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전탑은 벽돌을 구워서 만든 탑으로 중국탑 형식의 고려전탑이라 한다. 벽돌탑이 있다는 의미로 신륵사는 예전에 ‘벽절’로 불렸다고 한다. 여강을 굽어보고 있어 ‘여강의 등대’라 부르기도 한다.
다층전답 위쪽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를 모셔놓은 보호각이 보인다.
신륵사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문신 이색이 공민왕과 그 부모, 나옹화상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하였으나 대장각은 찾을 수 없고 그 내력을 새긴 비석 ‘대장각기비’만이 남아 있다.
신륵사에서 가장 강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절벽 위에 지어진 정자 강월헌은 나옹 화상의 당호에서 딴 이름이다. 나옹 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세워졌다고 한다. ‘삼층석탑’과 ‘강월헌’이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이곳에 서면 멀리서 굽이쳐 흘러오는 남한강 줄기를 바라보며 주위의 풍경에 도취되어 자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
이색의 ‘여강현 신륵사 보제 사리석종기’ 중에서 “강월헌은 나옹(보제)이 머물던 곳인데 그의 몸은 이미 불에 타 없어졌다. 그러나 강물과 달빛은 예전과 같다….”라고 써 있다.
세상의 온갖 번뇌 망상도 흐르는 물을 따라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도 한다.
신륵사와 연이 깊은 나옹화상과 이색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불가와 유가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나옹은 유배길 여강 강월헌에서 생을 마감했고 이색은 이성계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나옹 입적 후 20년 뒤 여강의 배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나옹과 이색은 다른 길을 걸었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출생과 죽음을 같은 곳에서 맞이했다.
신륵사 주변 여주 조포나루터는 마포,광,이포나루와 더불어 4대 나루터 중 하나였으며, 이 일대는 객주와 주막들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63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신륵사 수학여행차 이 나루를 건너다 도선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나 학생 49명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1964년 여주대교가 개통되고 현재 나루는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위령비만 멍하니 서 있다.
출렁다리를 통해 남한강을 건너 금은모래강변공원에서 바라본 천년고찰. 세종이 임금 시절 세번이나 신륵사를 방문했다는 신륵사의 풍경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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