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두륜산 대흥사를 구경합니다. 두륜산을 등반하려고 두어차례 왔었는데, 오늘은 절집과 북미륵암의 국보를 보기위해 찾았습니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되는 대흥사는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으며, 가람배치는 절터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중심으로 별원의 성격을 지닌 남원과 북원으로 되어 있다. 북원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원은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중건한 대광명전 일곽으로 나뉜다.
한옥여관 유선관은 지난 1923년에 지어졌다. 유선관이 애초에 여관용도로 쓰였던 것은 아니지만 대흥사를 찾는 객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여관으로 용도가 발전한 것이다. 현재 한옥 스테이로 리모델링하여 영업중이다.두륜산입구에서 대흥사에 이르는 길의 이름은 장춘숲길로 봄이 오래 머무는 숲이라는 뜻이란다. 약 4㎞로 이 길을 숲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구간에 나무가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주문 좌측 주차장에 주차 후 절집을 구경한다.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와 탑비 가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부도밭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난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 서로는 화산 선은산 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내부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와사자를 탄 문수동자 가 있다.해탈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오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두륜산 정상의 와불님을 친견 할 수 있다. 전에는 포토존이 자세히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어는데 지금은 없었진 상태이다. 산의 형태가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모습은 계룡산과 두륜산 두곳으로 알고 있다.북원의 대웅보전과 응진당 사이에 있던 범종각을 근래에 들어 천불전 가허루앞으로 새로이 지어 이전 하였다.해탈문 넓은 절마당과 무염지 뒤로 가로로 길게 전각들이 나타나는데, 금당천 남족에 해당하는 남원 구역이다. 남원에는 중심법당인 천불전이 있고, 관음전, 용화당과 적묵당 등이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관음전 내부.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세심당은 재가자들의 숙소로 쓰고 있습니다.가허루는 남원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건물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다. ‘가허루(駕虛樓)’라는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 이삼만 (1770~1845)이 썼다.천불전으로 들어서는 문인 가허루 문지방은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으며, 자연목 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정면에 천불전은(보물 제1807호)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 앞면에는 정교한 국화무늬·연화무늬의 꽃살 분합문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은 2짝이다.천불전 내부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으며 경주지역 옥석으로 만든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천불전을 둘러본 후 북원구역으로 가는길에 연리근을 볼 수 있다.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 온 느티나무 연리근이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라고 하며, 뿌리가 만났을 때 연리근,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 가지가 하나 되면 연리지라고 부른다. 부모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돼 사랑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자연의 신비를 확인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이곳은 침계루 앞의 금당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원이라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1899년 북원 일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침계루를 지나면 웅장한 대웅보전을 마주하게 된다. 대웅보전은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은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알려져 있다.건물 내부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하여 육봉선사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걸려 있다.대흥사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 이다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ㆍ판관ㆍ사자ㆍ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있다.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북서쪽에 남향하고 있다.건물 내부는 지장보살과 무독귀왕ㆍ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다. 그 외 좌우로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과 판관ㆍ녹사ㆍ사자 등 여러 명부의 권속들을 정렬하게 배치하고 있으며, 지장보살 뒷면에는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대흥사의 남원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조성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까이에 또 다른 신생불전인 문수전이 있다.대광명전 구역으로 선방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으로서,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동국선원 (東國禪院)’이라는 편액의 필체를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외부인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어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일지암과 국보를 찾아서 북미르암으로 향한다.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 후기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 나라의 다성으로 추앙 받는 초의 선사가 그의 '다선일여'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인 일지암이 나온다.흐르는 땀으로 범범이 될쯤 일지암의 차밭에 왔다. 일지암은 초의 선사가 수도하기 위해서 지은 암자로, 초의 선사가 열반에 들자 폐허가 되었다.일지암터는 40여년 전에 응송스님과 낭월스님이 그 터를 확인하여 그곳에 건물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터가 있는 곳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늘 질척거렸다고 한다. 물이 나오고 양지 바른 곳이라서 이곳에는 산돼지나 노루가 다니는 길목이었고, 그래서 숯꾼이나 초군들이 짐승 덫을 설치하던 곳이라고 한다.'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일지암 본당인 자우홍련사는 윗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 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에 담겨져 흐른다.일지암을 둘러본 후 되돌아 나와 북미륵암을 찾아간다. 두륜산을 등반했던 길인데, 너무 오래전일이라 초행길 같다.북미륵암은 용화전 요사채 등의 건물과 3층 석탑으로 이루어졌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다.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 에 조성된 마애불이며, 국보(제 308호)로 지정되어 있다.'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으로 본존불의 높이만 485cm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이 한국 마애불상 중에서는 양감 등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마애여래좌상 좌 후측에 있는 `북미륵암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의 삼층석탑 이다. 보물 제301호 이다.북미륵암을 둘러본 후 대흥사 표충암구역에 왔다. 초의선사 동상. 우리나라 차 문화의 초석을 다진 초의선사는 40여 년 동안 대흥사 일원에 머물렀다.표충사 호국문표충사 앞에 장군샘으로, 여름이면 시원하고 가을이면 따뜻한 물이 솟는 이 샘은 해마다 한 번씩 호수의 흐름을 보였는데, 물이 소용돌이를 일으켜 지붕 추녀 끝까지 솟구쳤을 때 받아 마신 어떤 스님이 모든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이후 이 샘의 물은 약을 달이고 차를 끓이는 데에 최고의 물로 꼽혀왔다.표충사 호국문안으로 들어서면 제법 큰 건물 `보련각`이 보이는데, 초의선사가 1852년(조선 철종 3년)에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표충사 내삼문인 예제문(禮齊門).외삼문인 호국문과 내삼문인 예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표충사와 표충비각이 나온다. 맨 뒤로 조사전이다.표충사는 전라남도 기념물 19호로, 정조대왕이 직접 쓴 '表忠祠' 편액이 걸려 있다. 그래서 표충사 편액 옆에는 '임금의 글씨가 있는 집'이라는 뜻에서 별도로 '御書閣(어서각)' 편액을 하나 더 걸어 두었다.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으로서 왜적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란 때 많은 업적을 쌓은 사명당 유정 스님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1폭)ㆍ5명(2폭)으로 2단 구성 아래 진영을 배치하고 있다.어서각 현판 오른쪽에는 오래된 비석 둘과, 그 두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두 비석에는 서유린(1738∼1802)이 1791년(정조 15)에 지은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명'과,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이 1792년(정조 16)에 지은 '건사 사적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서산대사는 호가 청허 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최씨이다.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 라고 불렀다.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 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 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이유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 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 하니 묘향산 보현사 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 와 함께 대흥사에 봉안 되어 오늘에 전한다.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 출신으로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이며 초의는 호이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으로 불린다.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 강사인 완호윤우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천년숲길 대흥사에서 고즈넉한 산사에 남겨진 고승의 발자취를 따라 나라를 지켜낸 기개를, 은은한 차향을 따라 다선삼매의 일지암, 조각수법이 한국 마애불상 중에서 양감 등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마애여래좌상을 육감으로 느껴본 시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