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식, 일식, 한옥의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건축양식의 가옥이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동개정길 7에 있는 군산간호대학교 안에 `이영춘 가옥`으로 유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영춘 가옥으로 오르는 계단위에 은행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기대하며 계단위로 올라간다.이영춘 가옥은 살림집이 아니었다. 이 가옥은 일제 강점기 구마모토 리헤이가 봄과 가을 등 두세 차례 농장을 방문할 때 임시 거처로 이용하여 별장 구실을 하였다. 건축 당시 조선 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만든 초호화 건물이란다.정원에는 흙에 심은 사랑의 인술. 쌍천 이영춘 박사 추모비를 볼 수 있다.안내문에 따르면 이 가옥은 `외부 형태에 있어서는 유럽의 형식을 따르며 평면구조는 일식의 중복도형을 바탕으로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의 온돌방이 결합된` 양식이다. 또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농장주들에 의한 토지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 보건 위생의 선구자 쌍천 이영춘 박사가 이용했다는 의료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이 집을 지을 때 백두산에서 가져온 낙엽송으로 통나무 집을 짓듯이 2m 정도 목재를 쌓았다고 한다. 또 따뜻한 느낌을 연출한 후 흙벽돌과 황토와 흰색 회를 섞어 마무리하고 지붕은 자연석 청석 돌판으로 덮었다. 안정감 있는 아름다운 모양이다. 이 건물은 빙점, 모래시계, 야인시대 등 드라마 촬영지였다.이영춘은 평남 용강군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전과 일본 유학을 거친 한국인 의학박사 1호이며 해방후 개정 중앙병원을 설립하는 등 군산지방에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평생을 바쳤다.외부관람은 아무때나 관람을 할 수 있지만, 내부 관람은 오전 10시 ~ 오후 5시 까지이며, 점심시간 12시~13시까지는 내부관람이 금지되어 있다.현재 내부는 이영춘 박사 기념 전시관으로 조성되어 있다.일제강점기 당시 지역 최대 농장주 구마모토는 고리대금업 등으로 교묘하게 토지를 끌어 모아 부를 축적했다. 한인 소작농만 2만 명에 달했을 정도. 구마모토는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 탓에 한인 소작농들이 견디지 못하자 의사를 채용했다. 훗날 한국 농촌의료봉사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쌍천 이영춘 박사가 바로 그다. 이 박사는 그렇게 한인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해 광복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핵, 매독, 기생충 퇴치에 평생을 바쳤다.해방전까지 구마모토 리헤이는 1930~1940년 군산 개정에 설치한 농장을 중심으로 1개 부(당시 '군산시')와 5개군('김제' '정읍' 등), 26개 면을 관장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1200여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3000여가구의 소작농을 부릴 정도였다.해방되면서 구마모토 리헤이가 머물던 별장에 이영춘이 살게 됐다. 구마모토 별장이 '이영춘 가옥'으로 불리는 이유다. 구마모토의 연구소 설립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영춘에게는 별장과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만 남았다. 1951년 7월 이영춘은 자신이 설립한 농촌위생연구소에 '고등위생 기술원 양성소'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이영춘은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4년제 간호대학인 군산간호대학교는 이렇게 출발했다.평면 구조는 일본식 중복도형을 바탕으로 양식 응접실과 일식 다다미방, 한식 온돌방 등이 결합된 절충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평면의 구조가 한식과 일식주택과는 달리 많은 요철이 있으며, 현재는 다다미방이 온돌방으로 개조되고 부엌 등 일부 설비가 변하였지만 외관을 포함한 전체적인 주거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건축 당시부터 사용한 고급 가구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가옥은 일제강점기 때의 새로운 주거문화의 이입현상을 볼 수 있으며, 혼신을 다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던 이영춘박사님의 삶이 깃든 가옥을 돌아보니 고귀한 숨결이 느껴지며, 이곳의 내적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기며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