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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행

진도 벽파정

2025년 5월 24일

선조실록 1597년 11월 11일자에 이순신이 명량대첩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다'라고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흔히 울돌목만 명량대첩의 현장으로 알지만, 사실은 전라우수영성 앞바다에서 벽파정 앞바다까지 모두가 이순신의 13척 배가 왜적 전선 330척을 격파한 세계적 승전지인 것이다. 그래서 벽파정을 찾아본다. 

 

 

 

벽파진은 진도군과 해남군을 잇는 항구로 울돌목이 진도군과 육지를 잇는 가장 가까운 해협이었지만 조류 속도가 빨라 항로로는 문제가 있어 1984년 진도대교가 준공되기 전까지 진도군과 해남군을 오갈 때 가장 많이 이용하던 항구이다. 벽파정(碧波亭)이 있었다고, 마을 이름도 벽파리다. 항구는 벽파진에서 벽파항이 됐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29일 벽파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이순신은 울돌목으로 수군진을 옮기기 전까지, 여기에 머물며 명량에서의 전투를 그렸다. 벽파항은 장군이 해남 어란진을 떠나 진을 치고 16일간 머물며 명량해전의 전략을 구상했던 곳이다.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는 유명한 장계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장군이 보성 열선루에서 쓴 뒤 거듭 강조한 두 번째 장계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둔 9월 15일(양력 10월 25일) 조수를 타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다. 울돌목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었다. 적은 수의 군사와 배로 많은 수의 일본군과 일본의 전선에 맞서려면 울돌목의 좁은 해로가 제격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구천부, 一夫當逕 足懼千夫)'는 이순신의 말은 울돌목을 염두에 둔 지략이었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큰 승리였다.
진도의 관문항이였던 벽파항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손꼽아 헤아려도 될 만큼 가구수가 적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나 조용하다.
넓다란 주차장 한쪽에 벽파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벽파정으로 오르는 길은 바위를 깍아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벽파정은 1207년(고려 희종3년) 진도의 관문인 벽파나루 언덕에 창건하여 1465년(조선 세조11년) 중건됐지만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았던 곳에 2016년에 복원하였다.
벽파정은 고려후기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여몽연합군과 회담 장소로 이용하는 등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다.
벽파정은 벽파항이 진도의 관문이였으니 진도에 오는 관리와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제격이였다. 또한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시인이 들렀단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일본군과 일촉즉발의 시간을 보냈던 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넓다란 암반위에 그래도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묘소 같기도 하고 정성이 가득한 화단이다.
수백 평도 넘는 어마어마한 넓적바위 위에는 길이 5.7m, 높이 1.2m, 폭 4.7m 규모의 거대한 거북좌대 위에 얹힌 높이 3.8m, 폭 1.2m, 두께 0.58m의 거대 비석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충무공 벽파정 전첩비`다.
빗돌 아래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 둘레에 동그랗게 물길을 파둔 것이 흥미롭다. 귀부 위에 얹혀 있는 전첩비는 높이가 거의 4m나 되어 동양에서 가장 높은 빗돌이라고 한다.
전척비는 노산 이은상이 글을 쓰고, 소전 손재형이 글씨를 썼다. 국문과 한문을 섞어 쓴 우리나라 첫 비석이다. 비면에 새겨진 888글자(한자 272자, 한글 616자) 모두 다른 글씨체로 쓰여진 것도 색다르다.
동양 최대 높이를 자랑하는 비석이라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앞은 감히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엄두를 내지 못한 까닭에 완벽하게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한다.
저 아래로 삼별초 군과 여몽 연합군이 화담 장소로 사용했다는 벽파정 정자가, 아득한 옛날의 피비린내나는 역사는 잊었는지, 그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에 들어온다.
비록 이제는 간간히 관광객이 찾는 벽파정이지만 그러나 벽파항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여전히 높다.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도의 관문이었고, 고려의 최후 보루였고, 조선을 지킨 파수꾼이었다는 사실을 늘 간직하고 산다.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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