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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행

용장성

2025년 5월 24일

진도에는 고려시대 삼별초가 몽고군에 저항해 싸우던 용장성이 있습니다. 진도 용장성(사적 제126호)은 고려 시대 대몽 항쟁을 이끌었던 삼별초의 근거지였다.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는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1232년)한 이후 대몽 항쟁의 주축이었다.

 

 

 

 

삼별초군은 753년 전인 1270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몽골군에 항복하자 항몽의지를 불태우며 총지휘관 배중순은 10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도 벽파 꽃자리항(연등)에 상륙한 뒤 용장성에 입성한다. 벽파진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다.
용장성은 왕궁을 감싸고 있는 토성과 외곽의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내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용장성 내성 입구 좌측에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사당 ‘정충사’ 가 있다.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 장군은 용장성에서 남쪽 대각선 끝단쯤인 굴포항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굴포 바닷가에 있던 배중손 사당의 현판과 배중손 장군 동상과 배중손장군항몽순의비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정충사 윗쪽으로 고려항몽충홍탑이 있다.
740여년 동안 잠자고 있던 삼별초의 역사를 깨우고 삼별초군의 정신을 후대에 계승발전하기 위한 ´고려 항몽 충혼탑´을 조성하여 놓았다.
충혼탑 앞에 다가간다. 삼별초 용사들의 기운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들의 외침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동북아를 넘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군에 대항했던 고려 삼별초군의 자주 국방정신을 기리고 대몽항쟁 시 전사한 삼별초 군인, 민초들의 혼을 달래고 이를 후대에 길이 기념하기 위해 높이 9.8m, 길이 20.5m, 너비 7.3m의 충혼탑을 조성했다.
삼별초의 생생한 항몽의 흔적을 화강암에 기록하여 놓았다. 최씨 무인정권의 특수 사병 부대로 출발했지만 몽골군에 대항하는 임무도 지니고 있던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하려는 정부에 반대해 집단 항거를 일으킨 상태였다.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물러난 삼별초는 왕족인 왕온을 새 왕으로 추대한 뒤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다. 개경 정부는 여몽연합군을 꾸려 삼별초의 진도 정부를 공격했다. 삼별초는 터를 잡은 지 10개월 만에 30㎞가량 떨어진 임회면 남동리 남도석성으로 퇴각했다. 당시 세계 최강의 몽골군과 맞서 싸우다 제주도에서 조정의 진압군과 몽골 연합군에게 최후를 맞는다.
용장성 홍보관에서 대몽항쟁에 대한 역사를 좀 더 깊게 배울 수 있다. 시대적 배경과 시간 순서대로 대몽항쟁을 잘 정리해놨다.
유적지 그 남겨진 흔적들.
삼별초는 처음 무신집권자였던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유래한 군사 집단이다. 야별초는 1219년(고종 6) 최우가 권력 유지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몽골(원나라)의 침략 이후 몽골군을 막아내는 정규군으로 재편된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우별초로 나뉘었다가,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자들로 이뤄진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로 불렸다.
삼별초의 역사를 성의 있게 보여 주고 있다. 패널을 꼼꼼히 읽고, 많지는 않지만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유물을 살펴보면 삼별초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삼별초를 단순히 군인집단쯤으로 배워 그 힘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곳 진도 용장성에 오면 실로 그들의 힘이 예상 외로 얼마나 막강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진도 용장성 왕궁지에 대한 조사는 1989년 왕궁지 중앙에 위치한 F지구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총 4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 총 18단 중 10단에 대한 발굴조사가 완료되었다. 이번 5차 조사결과 건물지 15동을 비롯하여 건물지와 관련된 제반시설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기와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청자류, 청동기류, 철기류 등이 확인되었다. 이중 청자류는 청자잔, 청자병, 청자접시 등 생활용기가 많으며, 청자돈편, 청자도판 등 고급자기류도 소량 확인되어 당시 건물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홍보관 옆에 다랑이 논 같은 형태의 용장성행궁터가 있다. 개성 만월대를 본떠 조성했다는 궁궐터에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았다.
층층이 쌓은 기단 위 궁궐은 평지에 건축하던 조선 시대와는 전혀 다른 고려 양식이다.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고 둘레가 13km나 되는 왕궁의 터를 만들 정도였다면 엄청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겠지요. 더욱이 진도가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던 곳인 걸 감안한다면 그것이 민초들의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지 눈에 선합니다.
궁터 주변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는 싸목싸목('천천히'라는 뜻의 전남 방언) 걷기 좋다.
길이가 13㎞에 달한다는 용장산성은 이쪽 산봉우리에서 저쪽 산봉우리까지 왕궁터를 중심으로 빙둘러 산성은 엄청 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도 용장성 왕궁지에서는 현재까지 16개 지구에서 50여동의 각종 건물지와 관련 유구들이 조사됨으로써 왕궁지로서의 위상과 규모를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진도 용장성 건물지는 개성의 고려 왕궁지를 비롯하여 강화 도성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제주도 항파두리 내성 건물지와는 건축 양식과 기법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진도 용장성 건물지는 이들 유적과의 직접적인 비교 연구와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13세기 몽골과 고려, 그리고 진도 삼별초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고고 자료를 확보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궁궐터 왼쪽에는 용장사가 자리잡고 있다. 용장사는 고려시대 창건됐다고 하지만, 지금 보이는 절은 최근 지어진 것이다. 고려는 관사를 새로 지을 때는 주변에 절을 함께 짓곤 했다.
극락전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석불좌상이 있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만큼 약사여래로 추정된다.
몽고군에 대항했던 고려 삼별초군의 항몽정신과 민초들의 우국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장과 삼별초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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