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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

선교장

2025년 7월 30일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 '대궐 밖 조선 제일 큰 집 강릉선교장'은 조선시대 양반가옥으로,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옛 건축미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조선시대엔 선교장 바로 앞까지 모두 경포호였다. 집 앞까지 배를 타고 들어와야 했기 때문에 선교장이란 명칭이 붙었다. 이후 호수 둘레가 12㎞에 달했던 경포호가 4.3㎞ 규모로 줄어들면서 육지화 된 곳곳에 도로가 개설돼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선교장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이 18세기 초에 지었다. 당시에는 사대부들이 관동, 즉 지금의 영동지방을 유람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들이 꼭 들러 쉬는 곳이 선교장이었다. 이후 300년간 증축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1965년에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길 63에 위치하며,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입장료는 어른 5,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이다.
전통가구전시관과 선교장박물관(문물관) 부터 관람을 한다.
전통가구박물관에는 각종 소목장 가구와 반닫이, 가마, 문갑 등 전통가구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문물관에는 선교장이 300년간 소장해온 유물 7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글씨인 '홍엽산거(紅葉山居)' 현판을 비롯해 조상이 대대로 임금에게 받은 교지,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직접 쓰다 하사한 향상(향을 올리는 상), 고종에게 직접 하사받은 궁중 모란도 병풍과 책걸이 병풍, 20세기 초 영국에서 직수입한 모자 등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희귀 유물등이다.
귀한 유물들 가운데 특히 이채로운 것은 가로 153㎝, 세로 145㎝ 크기 ‘태극기’이다. 국가등록유산인 선교장 태극기는 일제의 침탈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1908년, 근대식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해 선교장이 설립한 ‘동진학교’에서 구국의 염원을 담아 사용했던 것이다.
아직 솟을대문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연못을 배경으로 외별당 하나가 있다. 연못 쪽으로 돌출된 누마루를 연못 안쪽에서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 마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세운 정자 같다. `활래정`이다.
그러나 이 집은 단지 대청마루 하나 정도를 올린 것이 아니라, 건물의 구조를 다 갖췄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누마루와 온돌방, 다실은 일종의 휴식 공간이다. 이곳에서 손님도 맞이하고 담소했던 곳이다. 이름이 '활래'인 이유는 서쪽 태장봉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이 연못을 거쳐 경포 호수로 빠져 나간다는, '활수' 때문이다. 연못이지만 고인 물이 아니다. 시인 묵객들이 남긴 글씨가 많다. 1820년경 추사 김정희가 쓴 '단풍이 있는 산에 살리라'라는 현판도 있다.
연못 가운데 만든 섬은 신선계를 상징한다.
압도하는 또 하나는 행랑채이다. 지나던 선비와 풍류객, 일을 보는 집사들이 머물던 곳이라는데 집의 전면에 길게 자리 잡아 마치 성벽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드나들었으며 주인의 그늘 아래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행랑이 줄처럼 서 있다 하여 줄행랑이다.
줄행랑 솟을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연지당 뒷벽이 보이고,
행랑채가 길게 이어진 좌측 앞에 중사랑채가 보인다.
우측 안채 주옥으로 가 본다.
안채주옥 우측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맞이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선교장 장주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
동별당 담장넘어 외별당.
동별당 우측으로 돌아가면 언덕위에 사당이 있다. 선교장가의 신위를 모신곳으로, 이곳은 외부인 관람을 통제하고 있다.
안채주옥은 1703년 최초로 지어진 건물로써 선교장 종부(안방마님)의 거처이며 직계 여인들이 함께 지냈다.
안채마루에서 바라본 모습.
안채 부억을 통해 서별당으로 간다.
좌측이 연지당 뒤로 서별당, 우측이 안채의 옆 모습니다. `서별당`은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며 집안의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연지당`은 집안 내 홀로 된 여인들이 이곳에서 안채의 살림을 도와가며 지내던 곳이다. 앞마당은 받배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반입되는 재물을 확인하던 마당이었다.
서별당 협문을 통해 나가면 열화당이 나온다.
행랑채
큰 사랑채인 `열화당`은 특이하게도 건물 앞 지붕에 동판으로 차양을 달았다. 전통 가옥을 왜 이렇게 어색하게 복원했나 싶었는데, 설명문을 읽어보니 이해가 간다. 이 건물은 최초 건립 년도보다 100년 후인 1815년에 지었고, 러시아공사관이 이 채양 시설을 선물했다고 한다. 열화당은 친인척들이 이곳에서 정담을 나누며 기쁘게 살자는 의미의 이름이다. 현재 오르간을 설치하여 선교장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열화당 뒤 `초정`이다. 선교장 가장 뒤편 열화당 후원의 정자로, 다른 이름은 '녹야원'이다. 이 또한 1820년에 지은 건물로 이정도 살림살이라면 깔끔한 와가를 지었을 텐데 초가지붕을 얹었다. 왜 가장 높은 곳에 이런 집을 지었을까. 이곳은 시문을 짓고 책을 읽는 곳으로, 초가에 살고 있는 소작인들의 애환과 삶을 공감하고 검소와 베풂의 덕을 수련하도록 소박하게 지었다고 한다.
만석꾼 선교장의 곳간이었으나, 현재는 선교장의 생활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선교장 생활유물들.
선교장의 집사 또는 하인들의 거처.
한국전통문화체험관
선교장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소나무로 둘러싸인 숲길, 좌 청룡길, 우 백호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야간에는 조명이 어우러져서 장관을 이룬다.
백호길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선교장의 전경을 볼 수 있어 선교장의 필수 코스다.
선교장은 강릉 경포대에서 시내 쪽으로 가는 길옆으로 낮은 능선에 둘러싸여 홀로 서 있다. 들어가는 입구의 연꽃 만개하는 연못과 그 위에 서 있는 그림 같은 정자, 그리고 몇 칸이나 되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로 긴 행랑채와 그 안으로 안채와 동별당·서별당·외별당·열화당 등 줄줄이 보이는 지붕들은 이 집이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백호길에서 내려오면 초가가 보이는데, 지금은 한옥숙박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홍예원은 시인 묵객들의 거처로 사용된 곳이다. 지금은 한옥숙박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다. 사실 비워두는 것보다 쓰고 유지하는 것이 더 손이 가고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입금지'가 아닌, 방문자가 사용하는 곳으로 개방했다. 덕분에 이 귀한 문화유산이 죽지 않고 살아서 보전 되고 있다. '초정'의 가르침이 지금의 가능한 방식을 입은 듯하다. 부자 삼대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 집 식구들은 10대에 걸쳐 여전히 부자로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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