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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2025년 7월 30일

허균의 이야기는 강릉 초당동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이어진다. 허균과 그의 누이이자 시인 허난설헌(허초희)의 생가 터 일대를 문학공원으로 꾸며놓았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허난설헌 생가 터 ‘강릉 초당동 고택’, 허난설헌의 이름을 딴 ‘초희 전통차 체험관’으로 이뤄져 있다.

 

 

 

초당마을의 난설헌 생가 터 일원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된 것은 1980년대다.(균은 이름, 난설헌은 호로 알려져 허균·허난설헌 공원이 되었다.) 강릉시는 한때 이광노 가옥이라 불리었던 전통가옥을 매입하여 생가로 꾸몄고, 입구에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공원의 뒤쪽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주차비, 입장료는 없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을 기리는 공간이다. 허균·허난설헌기념관에서 남매의 작품과 삶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난설헌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은 슬하에 허성, 허봉, 허균, 세 아들과 딸 난설헌을 두었다. 그는 딸의 재주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세 아들과 똑같이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둘째 오빠인 허봉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면 여동생을 위해 귀한 책을 일부러 구해오기도 하고 친구였던 손곡 이달에게 누이의 글공부를 부탁하기도 했다. 손곡 이달은 조선시대 삼당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서얼 출신이다. 신분의 한계로 불우한 일생을 보낸 이달의 삶은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허균은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소설 '홍길동전'을 쓰게 되었다.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 허엽이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자신의 아호를 붙여 초당 두부라 했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교산 허균(1569∼1618) 26세에 정시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길에 올랐고,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글재주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역적모의 혐의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이 줄거리다.
기념관에 210여 수의 시를 수록한 ‘난설헌시집’을 비롯한 허난설헌의 서화작품과 동생 허균의 ‘홍길동전’ 목판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생가터와 울창한 솔숲이 있는 야외 공원이다. 키 큰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고즈넉하게 산책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시원해진다. '5문장가'를 기리는 시비가 일렬로 서 있었다. 아버지 허엽 말고도 큰오빠 성, 작은오빠 봉, 그리고 자신과 남동생 균이 그들이다. 한 가문에서 5문장가를 배출한 것 또한 조선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생가와 기념관 사이의 공원에는 난설헌의 동상이 있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8세 때부터 천재적인 시재를 드러냈으나, 불우한 삶을 살다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초당동 솔숲속에 단아하게 앉은 난설헌생가  난설헌생가의 정문.  '생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후대에 생가 터에 세운 양반가옥이다.
고택안으로 들어와 대문채를 바라본 모습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면 4칸 규모의 큰 사랑채와 마당이 있고  난설헌생가의 사랑채에는 교산 허균의 영정도 모셔놓았다.
총명하고 진취적이었으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 역적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허균. 소설 홍길동전에서 그의 개혁적인 사고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불행하게 죽은 누이의 글을 모아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시집이 발간되게 했으며 난설헌의 시가 칭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내외 담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조선의 양반집에서 볼 수 있는 내외 담은 가옥 내부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지키며 남녀의 공간 사이에 만들어져서 남녀가 내외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안채는 담장과 중문 등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허균은 외가인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났고 이 집터에서 태어난 이는 난설헌이다. 당연히 이 집의 주인이어야 하지만, 유교의 내외구분에 따라 동생의 영정은 사랑채로, 그 자신은 안채에 모셔진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의 삶을 가로막은 것이 '봉건의 질곡'이었다면, 죽어서도 그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김성립과 혼인을 하게 된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신혼의 단꿈은 잠시. 김성립은 아내의 뛰어난 글솜씨와 자신이 자주 비교되자, 점점 아내를 멀리하고 기방 출입이 잦아졌다. 급기야는 집을 나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고 허봉과 허균이 유배를 가는 등 친정이 몰락하자 시댁의 냉대는 심해지고, 두 아이마저 잃은 난설헌은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난설헌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시대가 품어내지 못한 불운의 시인이었다.

 

고택의 뒷뜰.
고택뒤에는 석빙고가 있는데, 원래는 흙으로 쌓여있는 것을 근래에 석재로 바꾸어 놓았단다.
생가 터 주변으로 펼쳐진 울창한 소나무 숲을 꼭 거닐어 볼 것. 이지역 강릉 시민이 즐겨 찾는 산책로다.
`호서장서각터`는 허균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도서관인 ‘호서장서각’을 만든 곳이다.
고택 뒤로는 아름드리 솔숲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면적이 넓지 않지만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 고요하다. 생가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외부와 이중으로 단절되어 있는 안채의 구조가 난설헌이 살았던 시대의 질곡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싶었다. 솔숲을 통과하면 경포호 산책로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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