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서천읍성을 둘러보기로 한다.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향교길 53-5에 위치한 서천향교는 서천읍성 주변에 있다.서천향교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서천읍성을 답사하기로 한다.향교는 문이 잠겼지만, 동재, 서재, 동무, 서무가 모두 남아 있는 형태였다.1413년(태종 13)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향전에 의하면 756년(경덕왕 15) 처음으로 문산면 문장리 향교골 돌고개 쪽에 암자 형식으로 세워졌다가 141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서천향교 좌측(하늘색 지붕)으로 서천읍성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가파른 언덕 위로 서천읍성 동문이 보인다.서천향교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임도길의 모습이다. 이곳에 주차를 하여도 되지만 향교에서 100여m 정도만 걸어 오면 된다.서천읍성은 세종 연간(1438-1450년경) 금강 하구를 통해 충청 내륙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돌로 쌓은 1645미터 규모 연해읍성(주로 세종 연간에 왜구 침입 방어와 지방행정 안정을 꾀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해안 요충지에 축조한 읍성)으로 만들었다.서천 읍성 안내도.`충청도읍지`등의 문헌에 따르면 `서천읍`에는 치성(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에 돌출해 쌓은 시설)이 1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16개소가 대체로 90m의 간격을 두고 설치된 것이 확인되는데, 이는 1433년(세종 15년) 150보 간격(주척환산 155m)으로 설치하도록 한 기준보다 촘촘하게 배치된 형태로, 다른 읍성에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 등 학술적인 가치가 인정된단다.1438년(세종 20년)에 반포된 '축성신도(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 조선 초기 성을 쌓을 때 기준)'에 따른 계단식 내벽과 1443년(세종 25년) 이보흠이 건의한 한양도성 '수직 내벽' 축조기법이 동시에 확인되는 등 축성정책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읍성이다.서천읍성은 일제가 일제강점기 '조선읍성 훼철령(1910년)'을 내려 전국의 읍성을 철거하는 수난 속에서 성 내부의 공해시설(행정·군사 등 공무수행에 필요한 시설)은 훼손됐지만, 남문지 주변 등 일부를 제외한 성벽은 대부분이 잘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둘레 1645미터 가운데 1535.5미터(약 93.3%)가 잔존했다.서천읍성 남문의 모습으로 성벽 높이는 3m 정도이다.남문안으로 들어가면 성안쪽으로 경사가 심한 편이다.성곽은 외벽은 돌로 쌓고, 내벽은 토성 형태의 모습이다.남산-서천읍성-오석산이 남북으로 축을 이루며 나란한 곳 중간이다.현재 서천읍성은 동문과 남벽, 서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고, 긴 계획으로 읍성 전체를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서천읍성 동문 누각 안.서천읍성 동문에서 향교마을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서천읍성 안의 현재 모습은 여중.고가 자리하고, 그 아래로 민가 수십 채가 오밀조밀하다.서천읍성 주변으로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흙으로 쌓아 만든 서천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만들어 바깥과 통하게 만든 성으로, 전설에 의하면 여자 100명이 성을 쌓고 장사 1명이 홍여다리를 짓는 내기를 하였는데, 여자들이 성을 다 쌓고 즐거운 함성을 지를 때 장사가 급히 마지막 돌을 끼워서 똑같이 끝나 무승부가 되었다고 한다.이 읍성을 보면서 없애기보다 제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한다. 그나마 자취를 더듬어 잃어버린 옛 모습을 되찾아가려는 노력은, 관광을 넘어 정체성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