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0일
진안 구봉산등산후 와룡암 답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구봉산은 앞을 구분할수 없는 짙은 안개로 포기하고 와룡암부터 답사를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문화공간이였던 누각이나 정자와는 달리 공적 기능을 겸한 공간으로서의 암자를 경치 좋은 곳에 지어 교육 기능을 겸하였던 정자가 주천면 주자천에 있는 와룡암이다.
이 암자는 지명에서 알수 있듯이 주자를 신봉했던 군자지향인 주천면의 주양리 주자천 변의 소 부근에 위치해 있는데, 용이 꿈틀거리다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와룡암위에 세웠다.
와룡암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마루집으로, 바로 주자천 건너 주천서원(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42호)의 강당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하다.
와룡암 내부 벽면에는 많은 시액의 현판과 편액, 주련이 걸려 있어서 와룡암의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고 있다.
와룡암은 긍구당 김중정(1602~1700)이 1636년(인조 14)에 첨지중추부사로 있다가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친명파의 한사람으로 사림에 묻힐 것을 각오하고 36살 때인 1637년(인조 15) 조부인 김충립과 함께 주천으로 낙향하여 시와 거문고로 즐기다가 후진양성을 위해 53세 때인 1654년(효종 5)에 세운 개인 서당 겸 학당이다.
주천서원은 우리가 보아온 규모를 갖춘 서원이 아닌, 홍살문, 외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강학공간은 제외되고 제향공간인 사당만 있다.
와룡암은 단순한 정자나 암자의 의미를 떠나 학문의 전당으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당 겸 학교였을 뿐만아니라, 건축양식 및 현판, 주련 등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