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7일
경주는 경주남산부터 웬만한 사적지는 몇 차례 걸쳐 다 둘러 본 여행지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대릉원 하고 새로 복원 한 월정교를 보고 집으로 돌아 갈 계획으로 대릉원주차장을 찾았지만, 섭시 37도 가 넘는 날씨에도 대릉원주변의 주차장 및 황리단골목길은 사람들로 인산인해 다. 피서를 경주로 왔나? 한여름 청춘들로 경주의 열기로 뜨겁다. 주차가 비교적 쉬운 교동의 최부자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웬걸 교촌길 교촌교까지 길 양옆으로 주차가 되어 있다. 어렵사리 교촌교옆 사마소부근에 주차를 하고, 남천을 따라 월정교 방향으로 향한다.
최부자 가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소인 경주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마을이다.
교촌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신라 국학이 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지며 우리나라 학문의 맥을 이어왔다. 마을 이름이 교동, 교촌, 교리등으로 불리는 까닭도 바로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교촌마을 홍보관에서 교촌안길을 따라 가면 남천을 가로지르는 월정교 가 나온다. 1200년 전 신라의 교량을 복원한 것이다.
곧게 뻗은 회랑과 웅장한 2층 문루가 근사하다.
교각 위에서 바라보는 남천과 일대의 풍경도 여유롭다. 어느 방향을 건너든 월정교 주변엔 공원과 산책로가 이어진다.
교촌의 상징적인 장소 경주향교를 관람한다.
경주향교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세워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성종6년(987)에 지방교육기관인 학원을 설치하고 11년(992)에 시설을 정비했으며, 조선시대에 향교로 이어진다.
경주향교 정문(외삼문)은 굳게 닫혀있어, 경주향교의 전사청으로 들어가는 상용문으로 향한다.
상용문 안으로 들어가면 경주향교 우물이 나오며, 건물은 전사청,고직사, 존경각,전교실등이 있다. 경주향교 우물은 향교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단다. 삼국유사에의하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요석궁이 바로 이곳이며, 이 우물은 요석궁의 우물로서 여기에서 태어난 설총이 이 우물 물을 마시고 대학자가 되었다해 총명수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경주향교 명륜당(보물)
경주향교 대성전 동무 서무(보물)
경주향교 신산문(보물)
경주향교 외산문
한옥이 늘어선 교촌마을의 골목길.
전국 3대 김밥 중 하나라는 대단한 위상을 가진 '교리김밥' 김밥을 포장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다른곳으로 이전했으며, 유명세에 떼돈을 벌어 여러곳에 분점을 열었단다.
최부자집 주변에 귀여운 비단벌레차 가 보인다. 전동차는 오전 9시부터 7시까지 운행하며 계림, 향교, 최씨고택, 교촌마을, 월정교, 꽃단지, 신라왕궁, 월성홍보관의 2.9km를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단다.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최부자집은 방이 99칸이었다고 전해진다. 고택은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육훈으로 미루어보아 그 옛날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앞서 실천한 겸양있는 집안이었다고 생각된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는 등 최부자집의 육훈이다.
최부자집 곳간.
최부자댁 곳간 앞에는 과객을 위한 쌀통이 하나 있다. 쌀통에는 위로 난 동그란 구멍이 있는데 양손을 넣어 쌀을 양껏 꺼내기엔 조금 작다. "지나가는 과객을 위한 쌀통인데, 여기에서 쌀을 꺼내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했다"며 자신이 먹을 수 있을 만큼만 꺼낼 수 있는 크기인 이유는 욕심을 경계하라는 뜻"이란다.
최부자집 안채
최부자네집에서 이어져 내려온 법주이자 전통 가양주.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에게만 전수시켜온 독특한 술로 색깔은 연한 갈색이며, 감미로운 맛과 향기, 깨끗한 뒤끝으로 정평 나 있다. 재료로는 찹쌀, 밀누룩, 집뜰의 우물물이 쓰인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맥이 끊길 뻔 했으나, 지금도 가내사업으로 전수되고 있다.
교촌의 골목길을 따라 가다보면 독립유공자 집이 보인다.
독립유공자
최완 선생 생가에서 차를 팔고 있길래 발길을 멈추었다.
최완 선생은 최준 선생의 둘째 아우로 1909년 안희제 이원식 윤병호 서상일 등 80여 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계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했다.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810년 8월에 일제의 강재 조약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3.1운동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 해 4월 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과 의정원 위원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간계와 음모로 체포.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했다.
고택 안으로 들어가면 마구잡이로 피어난 꽃들의 화분이 마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질서해 보였으나 나름의 질서로 자기자리에 한껏 피어나 있었다.
팥빙수 한그릇으로 더위에 지친 나를 달래본다.
경주사마소를 끝으로 교촌마을을 둘러 보았다. 사마소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방의 선비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곳이다. 또한 자기수양을 위해 선비들이 찾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