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9일
105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전국 곳곳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졌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만방에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많은 분들이 대한독립만세운동에 참여 했습니다. 그중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나의 슬픔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을 답사하러 왔습니다.
이곳은 순대가 유명한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아우내 병천순대거리 입니다. '아우내'란 백천천과 광기천이 합수된 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아우내는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길목에 있어 조선 후기 오일장이 개설돼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1일과 6일 등 5일을 주기로 장날이 찾아오면 각종 토산물과 일용잡화가 아우내장에서 거래된다. 장터 주변에는 명물인 병천순대와 순대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30여곳의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지금은 병천순대가 별미로 입소문을 타면서 주말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변한 곳입니다.
병천 순대거리 주변에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공원 중앙에 저고리 차림의 아낙과 도포에 갓을 쓴 노인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남녀노소를 형상화한 조각상이 세워져 그날의 함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열린 건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한 달 뒤인 4월 1일 병천 장날이었다. 맞춘 것처럼 음력 3월 1일이었다. 장날에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장날을 거사일로 택한 이유다. 만세운동에는 일본 헌병 추산 3,000명이지만 약 6,000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관순 열사는 만세가 열리기 하루 전 마을 앞 매봉 꼭대기 봉화대에 불을 피워 인근 지역에 알렸다. 일본 헌병 보고서는 여기저기 불꽃이 일어 분위기가 불온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만세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19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의 순국자 추모각에는 49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실제 사상자는 일본 헌병의 기록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망자 중에는 유관순열사의 부모도 있었읍니다.
방문을 하던날에는 유관선열사 사적지 기념관 마당에 3월 1일 아우내봉화제를 위해 시설 설치 중으로 혼잡하였지만 관람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먼저 유관순열사의 추모각에 들려 참배하기로 합니다.
유관순열사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추모각 내부.
유관순열사 동상.
기념관은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서대문형무소 벽관체험 코너 등을 갖추고 2003년 4월 개관했다.
1917년 5촌 조카에게 돌 선물로 직접 떠 준 뜨개모자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1902년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이화학당 재학 시절 3ㆍ1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휴교령이 내려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과정, 서대문형무소 안에서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1920년 순국하기까지, 짧지만 불꽃 같았던 생애를 전시하고 있다.
`경'자가 선명히 새겨진 서대문형무소의 벽돌은 수감자들의 고된 노역으로 생산된 것이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을 가로막은 감옥의 높은 담장과 건물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했다.
제100주년 3.1절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유공자에게 주어지는 훈장 중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수여하였다.
기념관입구에 세워져 있는 초혼묘 봉안 기념비문.
열사의 시신은 옥사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인계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동교회에서 간략한 장례의식이 거행된 뒤 그의 육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단다.
기념관 뒤로 초혼묘와 봉화탑으로 오르는 등산로 곳곳에 자연석으로 그를 추모하는 시와 글이 적혀 있다.
매봉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유관순 열사 초혼묘가 있습니다.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봉안한 것이다. 초혼묘(招魂墓 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
초혼묘뒤로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가며는,
4월 1일 아우내장터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불을 피웠던 봉화지 매봉산(해발 210m) 정상에 있습니다. 매봉산은 천안시의 남동쪽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당시 그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타올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이 세워졌다.
유관순열사 생가지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 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12월 복원한 것입니다.
유관순열사 생가입니다.
생가 작은 방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앉아 거사를 도모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드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연해 놓았다.
생가 옆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매봉교회는 여느 시골 교회에 비하면 제법 규모와 품격을 갖췄다. 열사가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기 전 공주영명학교에서 수학한 것도 이 교회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봉교회 지하실에는 유관순열사의 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만세운동이 열린 아우내 장터와 사적지를 거쳐 생가까지 유관순 따라 걷기길이 조성돼 있다. 매봉 정상의 봉화대와 중턱의 열사 초혼묘 등 독립운동을 하신분들을 생각하며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 가슴깊이 새기며 둘러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