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9일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에 위치한 ‘외암민속마을’을 답사를 한다. 외암민속마을은 전통 가옥과 건축물들이 잘 보존돼 있어 역사가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도 불린다. 500년 전 예안 이씨 일가가 이주한 후 형성된 전통 마을로, 60여 가구의 주민들이 지금껏 전통을 지키며 거주하고 있다. 조선후기 충청지방 양반집과 초가 등이 잘 보존된 이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주요민속문화재(제236호)로 지정되어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무언가 옛날로 돌아감직한 풍경이다. 마을에 들어가려면 개천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는 안과, 밖의 경계가 명확함을 알려준다. 다리 건너 마을 입구 어귀에는 장승, 솟대가 옛 모습 그대로 세워져 있어 여기부터 조선시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정확히 알려준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외암 민속마을은 한 마디로 고즈넉하다. 외암천을 따라 외암민속관이 있다.
외암민속관 홍보관
상류층 가옥
중류층 가옥
초가삼간인 하류층 가옥으로 전개를 하였는데, 초가삼간이 제일 맘에 든다.
외암마을 민속관을 살펴 본후 본격적으로 마을을 둘러 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이 지역 가옥들은 옛 집주인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영암댁, 신창댁 등 택호가 정해져 있어 조선시대 마을에 대한 현실성 있는 체험이 가능하다.
기와고택 초가집 돌담길 등 500여 년의 전통을 이어가는 외암마을의 삶이 다가오는것 같다. 그것은 나의 어린시절 초가집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건재고택 방향으로 들어 가면, 좌측 담장끝에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 가 마을 한복판에 있는데, 이 보호수에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과 약속 성실함의 의미를 담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단다.
신창댁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이용현에서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해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는데 이곳에서 6세손까지 살아 병사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손들이 서울로 이전해 병사댁이라는 택호가 사라지고, 후대의 친정집이 신창으로 신창댁이라고 불린다.
신창댁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ㅁ자형 평면으로 사랑채가 따로 없으며,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건넌방 끝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외암마을 안에 있는 유일한 식당이다.
중요 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된 건재고택은 외암리를 대표하는 가옥이다.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집을 지은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영암 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단 개방시간때에 답사를 할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어정쩡한 방문시간에 온 나는 담장너머로 스치드 지나간다.
한옥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는데 외암마을은 많은 집이 정원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란다.
건재고택은 규모가 매우 크며 큰 집과 작은 집이 별개로 배치되어 있다.
고샅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집들보다 돌담에 시선을 먼저 빼앗기기 마련이다. 외암마을을 빛나게 하는 건 누가 뭐래도 돌담이다. 마치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된 미로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다행인것은 골목마다 이정표가 있어 길찾아 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참판댁으로 가는 도중 연자방아를 볼수 있다.
돌담길이 고즈넉하게 둘러쳐 있는 참판댁에 왔다.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에게 하사받아 지은 참판댁의 솟을 삼문을 바라보고 있다.
참판댁의 5칸 사랑채는 一자형이며, 사랑채 좌우로 돌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하여 놓았다.
솟을삼문 밖 우측 돌담을 따라 돌아 가면, 따로 안채로 들어 가는 문이 또 있다. 안채로 가는 길에 넓은 판석을 깔아 운치를 더했다. 비나 눈이 와서 마당이 질어지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딤돌로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
외암마을은 연엽주로도 유명하다. 조선 고종 때 현감을 역임한 이원집이 궁중에 있을 때 왕에게 올린 술로 대대로 종부를 통해 전수되었다. 1990년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솟을대문 우뚝한 기와집과 조개껍데기처럼 낮게 엎드린 초가집이 번갈아 반긴다. 가장 소박하면서도 정다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외암 이간 선생의 종손이 살고 있어 종손댁이다. 문앞에 차량이 있었 불가피 이렇게 사진을 촬영한다. 종손댁도 개방이 안돼 담장 너머로 종손댁의 규모를 대충 짐작한다.
외암종손댁 대문 앞에는 불천지위로 모시는 외암사당이 있다.
외암마을의 담장은 막돌로만 쌓아올린 담이다. 돌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고 동결로 파괴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암마을에서는 참판댁 같은 양반 주택의 담장조차 기와를 얹지 않았다.
참봉댁은 참봉을 지낸 이중렬과 그의 아들 이용후의 집이다.
마을의 서쪽 길을 따라 올라가다 골목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교수댁이 나타난다.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집이다.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했다.
외암민속마을 마을회관
마을회관 앞 마을 박물관.
외암민속마을에 있는 놀이터입니다.
체험 민박집 하서원.
외암 이간 선생묘.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 호는 외암, 추월헌. 강문8학사의 한 사람으로, 인물성동론을 주장, 그의 학설을 지지하는 일파와 낙론을 형성하여 호락논쟁을 이끌었다. 1777년(정조 1)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순조 때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외암 민속마을에는 충청도 고유의 격식을 갖춘 양반고택과 초가집등 마을 구석구석으로 이어주는 길이 총 5.3㎞에 달하는 돌담이 외암 민속마을의 시그니쳐로 제 멋을 내고 있다. 단순한 여행의 의미를 넘어, 우리 전통문화의 체험과 학습적 가치가 마음에 다가오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