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계 김장생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 제자들이 1643년(인조 12)에 창건해 1660년(현종 원년) 사액 받았습니다. 돈암서원은 이후 송시열과 송준길 등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기호학파( 조선 시대, 선조 이후에 이이를 시조로 하여 이루어진 성리학의 한 파)를 대표하는 서원이 됐다. 돈암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 한국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개태사에서 약 8km 떨어져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을 보고 가지 않을 순 없다.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기전 이길을 따라 돈암서원 산앙루 주변에 주차를 하였는데,
지금은 우측으로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는 걸 보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후 돈암서원의 위상을 말하고 있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붉게 칠해진 홍살문(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라는 의미)을 지나면 교류와 유식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됐던 산앙루가 눈길을 끈다.
돈암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원래 있던 숲말이 지대가 낮아 장마 때면 서원마당까지 물이 차오르는 일이 있어 1881년(고종 18)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현재 숲말 언덕 위에는 돈암이라 새겨진 돼지가 엎드린 모습을 한 큰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서 서원 명칭이 유래됐다고 한다.
돈암서원 문루 산앙루 `높은 산은 우러러 보고, 큰길을 따라가네`에서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산양루 2층의 모습.
`음풍농월`편액의 뜻은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를 짓는다는 뜻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즐기는 것이다.
천지 간에 가득 차 있는 넓고 큰 기운을 의미하는 `호연지기`의 편액이다.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 사계 김장생 선생(1548∼1631)의 덕을 기리기 위해 1634년 사계의 제자와 지역 사림이 건립했으며, 조선 효종 10년(1659년) '돈암'이라는 현판을 하사했다. 보물 제1569호 응도당을 비롯해 숭례사, 양성당, 장판각 등의 건물과 하마비, 송덕비 등이 남아 있으며,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과 고종황제가 하사한 옥잔 등이 보존돼 있다.
돈암서원 이건비
돈암서원 경내 배치도.
돈암서원으로 진입하는 주 출입문이다. 입덕은 덕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돈암서원의 건축 배치는 다른 서원에 비해 특이하다. 입구에 입덕문(入德門)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건물의 강당 격인 양성당(養性堂)이 서 있고, 좌우에 동재 거경재(居敬齋)와 서재 정의재(精義齋)를 배치했다.
`거경` 은 성리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로 우러륵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말하며, 유생들이 학습하던 공간이다. `정의` 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이다. 정의재는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양성당 바로 앞에 서원의 내력과 김장생과 김집의 학덕을 기리는 원정비가 서 있다.(연산현둔암서원비기)
돈암서원의 강당 양성당.
양성당은 사계 김장생이 스스로 늙더라도 게으르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고자, `오랫동안 힘들여 본성을 기른다`는 의미를 부여한 당호이다.
양성당 과 전사청 사이에 돌담이 아름답게 길게 이어져 있다.
양성당 뒤뜰 모습으로 숭례사 내삼문과 전사청 협문이 보인다. 특히 숭례사의 꽃담은 다른 서원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놓쳐선 안 될 볼거리다.
돈암서원 숭례사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내삼문으로, 담장벽에는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전세체로 새겨놓은 12글자가 있다. 무심코 건물 외형만 보면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돈암서원 꽃담장으로 현재 불리워지고 있는데, 꽃담장은 본래 궁궐 같은 공간에 연출된 독특한 전통담장이다. 돈암서원 숭례사를 둘러싼 꽃담장은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알려준다.
신문 좌우의 꽃담에는 地負海涵(지부해함,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한다), 博文約禮(박문약례,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瑞日和風(서일화풍,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계의 사상을 축약한 글이다.
`예를 숭상하다`는 의미의 숭례사에는 주향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성당 좌측으로 장판각 과 정회당의 모습이다.
장판각은 판을 간직하여 보관하는 곳으로, 사계 김장생의 문집 등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회당으로 `정회`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자락의 고운사터에서 1954에 옮겨 왔다.
응도당으로 가면서 돈암서원을 바라 본 모습이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1880년 (고종 17년)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 에 옮겨서 지었다. 양성당이 이미 강학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숲말에 있던 서원의 위치와는 다르게 사당과 직각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 이 강경 죽림서원 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장수강학의 성격을 가진 강당으로, 원래의 건물은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랐다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누 마루식 건물로 겹치마에 맞배지붕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며,
박공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하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가첨지붕)을 퇴칸처럼 달았다. 응도당은 규모가 크면서도 안정감 있게 건축적 가치를 가장 돋보이게 만든 부분은 공포와 화반, 대공 등 조각 수법이 매우 세밀하고 아름답다는 점이다.
화반은 초방 위에 장여를 받치기 위하여 끼우는 조각으로 화려하게 만들었다.
응도당은 비록 당초 위치에서 이전되기는 하였지만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이상적인 고대 예제를 따라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며 현존하는 건물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비록 유생들은 떠나고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간 사라진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것은 없다. 사라지는 것들이 남긴 빈터에는 오롯이 역사가 채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