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개태사는 고려 제1대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승 기념으로 세운 사찰로, 왕건은 이곳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지은 절이다. 오늘 개태사에 찾은 것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혹하여 왔다. 염라대왕을 만나게 되면 이승에 살 때 개태사의 가마솥을 보았다고 대답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폐역이 된 개태사역 부근 1번 국도 옆에 개태사가 있다. 계룡시 방향에서 진입하려면 집중을 하고 찾아와야 하는 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황산벌에서 후백제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삼국 통일 대업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세운 개국 사찰, 개태사를 관람하겠습니다.
개태사는 고려시대 말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했으나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가 1934년에 개태사지에서 300여m 떨어진 이곳에 중창되었다.
개태사 신종루로 천왕문및 범종각이다.
신종루를 들어가기전 개태교 양옆으로 연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신종루 1층 안에는 사천왕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이층 누각에는 범종각이 있다.
신종루를 지나 절마당에서 개태사 전경을 보고 있습니다.
정중앙에 `개태사 오층 석탑`으로 개태사지에 있던 탑을 개태사로 옮겨왔으며, 고려 시대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개태사 오층 석탑 오른쪽으로 스님들이 거주하고 있는 요사채 3동이 있으며,
개태사 오층 석탑 좌측으로는 상소문 비석, 어진각, 극락대보전 등이 있다.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국보 제213호 금동대탑(사진·고려시대 10~11세기 제작 추정)을 원래 있던 절에 돌려 달라는 안내문이다.
개태사 옛터에서 도굴꾼 이 몰래 도굴했다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얻었고, 이후 이 전 회장이 리움미술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호암미술관에 1987년 기증하였다고 한다. 리움에서도 개태사 옛터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소장품 전집에서 밝힌다.
개태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내부
대웅보전에서 주목하여 볼 것은 개태사 쇠북으로, 일반 사찰의 쇠북보다 큰 개태사의 쇠북은 정교하게 제작돼 개태사의 위상을 증명한다. 이곳에 있는것은 가품이며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단다.
쇠북은 사찰 내의 모임, 행사 등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보통 지름 60∼70㎝의 크기다. 하지만 개태사의 쇠북은 지름이 102㎝에 이르는 대형이다. 게다가 쇠북의 표면에 굉장한 공력을 들여 일반 사찰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개태사 삼성각 과 염라대왕이 보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철확 보호각이 나란히 있다.
개태사 삼성각 내부.
`염라대왕이 물어보면 봤습니다` 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철확이다. 직격이 3m, 높이가 1m 정도 되는 거대한 가마솥이다. 흔히 고려 때 스님들의 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는데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장을 끓이던 솥으로 적혀 있다 한다. 이 절이 그 당시 얼마나 크고 스님이 많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가뭄 때 사람들이 이를 끌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녔으며, 1944년에 고철로 쓰려고 부수려 하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쳐서 파괴를 모면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석조삼존불상을 모신 극락대보전으로 가 봅니다.
극락대보전 앞에는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석조부조물.
극락대보전에는 석조여래삼존입상 이 모셔져 있는데, 석조여래삼존입상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태사를 건립하고 세운 삼존불상이다. 본존불 높이 446.2cm, 좌협시보살입상은 374.8cm, 우협시보살입상 369.8cm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고, 왼손은 손가락을 구부려 배에 댄 모습은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의미로 새로운 왕조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의미란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상소문 비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왕의 초상화)를 봉안한 어진전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 과 청동상 뒤로 어진이 있다.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전승기념으로 세운 사찰이다.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자 했던 상징적인 장소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