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6일
2018년 마곡사·선암사·부석사·통도사·봉정사·대흥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은 법주사는 품새부터 달라 예사로울 수 없는 기운을 발하는 각 시대의 중요 불교문화유산을 간직한 곳으로 그야말로 꼭 관람하여야 할 곳이다.
속리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충북 보은의 말티재는 보은읍 장재리와 속리산면 갈목리를 연결하는 고개 이름이다. 지금은 인근에 ‘동학 터널’과 ‘갈목 터널’이 뚫리면서 굳이 이 고개를 넘지 않고도 속리산과 법주사로 빠르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였다. 지금은 관문전망대를 만들어 말티재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말티재 고개마루에 주차장이 있으며, 관문전망대로 가는 길 모습이다.
관문 상층에는 까페와 전시실 화장실이 있으며 연결된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말티재전망대가 나온다.
말티재란 이름은 세조가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 대사를 만나기 위해 속리산으로 향할 때 가마로는 도저히 갈 수 없어 말로 갈아타고 넘은 고개라 해서 붙었다는 설, 고려 왕건이 박석을 깔아 넘어 ‘박석재’라 불리기도 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마루(높다)’의 준말인 ‘말’과 고개를 의미하는 ‘티’와 ‘재’가 합쳐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말티재 전망대에 오르면 이 열두 굽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기어오르는 듯한 길이다.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정이품송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는 재위 10년째인 1464년 2월 27일에서 28일 현재 법주사 말사인 복천암에 있던 스승 신미 대사를 만나 불법에 귀 기울이고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세조가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서 있는 소나무 밑을 지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늘어진 가지에 걸릴까 염려해 "연 걸린다"고 말하자 가지가 저절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주차장에 주차후 예부터 절집을 찾는 이들이 걸었던 오리숲길은 사내리 상가거리부터 법주사 입구까지 이어진 길이 십리의 절반인 ‘오리’라는 데서 유래했는데, 지금은 이름을 바꿔 속리산자연관찰로로 개명되었다.
법주사는 553년 의신 조사가 창건하고 776년 진표 율사가 중창한 천오백 년 고찰이다. 의신 조사는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절을 지을 곳을 알아보던 중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산세에 탄복해 이곳을 창건지로 정했다고 한다. 또 진표 율사가 속리산에 오자 밭 갈던 소들이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짐승들의 경배를 목격한 농부들이 속세를 버리고 그를 따라 입산수도한 데서 '속리'(속세를 떠나다)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며 '법주'는 부처의 가르침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속세의 망상을 버리고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기둥이 하나인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에는 `호서제일가람``속리산대법주사`글씨의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법주사 부도군이 있으며,
이어서 속리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세조길이 나오는데,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이어지는 계곡에 '목욕소'가 있는데,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곳이다.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어린 조카 단종을 제거했던 세조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걸었던 길이 지금 '세조길'이라는 이름의 산책로로 조성돼 있다.
세조 길은 법주사에서부터 복천암까지 편도 약 3.2㎞로, 세조가 심신을 치유하기 위해 거닐던 길은 현대인의 힐링 길로 다시 태어났다.
금강문으로 들어가기전 수정교 주변에 `벽암대사비`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승병장이자 남한산성 증축에 참여하고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법주사를 다시 세운 벽암대사 관련 비석이다. 다른 하나는 봉교비다.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든다는 의미로,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란다.
`속리산 사실기비 ` 비각 안에 있으며, 1666년(현종 7)에 송시열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수정교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법주사의 절집들이 밀집된 곳으로, 곳곳마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불교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발걸음을 분주하게 한다.
금강문은 야차신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금강역사를 모신 문이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천왕문이 보이는데, 먼저 좌측 수정봉 밑으로 금동미륵대불, 석련지 등을 관람하기로 한다.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물 `마애여래의상`은 사리각 옆 추래암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마애여래상 좌측으로 들어가면 법주사 사리각에는 금오선사 등 여러 고승 대덕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수정암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법주사 `석조`는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30㎝, 길이 446㎝, 너비 240㎝, 두께 21㎝의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능인전은 세존사리탑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안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를 알 수 없는 16나한상과 여래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다.
능인전 뒤로 고려말 공민왕이 국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면서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의 일부를 이곳 법주사로 옮겨 왔습니다. 이 진신 사리탑을 모신 별도의 전각을 흔히 '적멸보궁'이라고 부르는 데 특이하게도 법주사는 이 진신 사리탑 앞에 석가모니불과 제자를 모신 능인전이라는 다른 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능인전 우측으로 이름모를 탑들이 있으며,
금동미륵대불 뒤 절벽 큰바위에는 자정국존비를 새겨 놓았다.
1270년 당시 법주사에 머물렀던 자정국존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로서 고려 충혜왕 3년(134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스님은 많은 절들에 머물며 유식론을 강설하며 92권에 달하는 경론해설서를 찬술하기도 했으며, 말년에 법주사 주지스님으로 계시다가 향년 88세로 입적하셨습니다.
`자정국존비`가 있는 그 앞으로 진표 율사가 청동과 금으로 7년에 걸쳐 처음 조성했던 금동미륵대불은 조선조 고종 6년(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발행했던 당백전 화폐의 주조 재료로 쓰기 위해 몰수당했다.
그후 미륵대불은 1963년 시멘트를 재료로 복원됐으나 붕괴 위기에 처해 해체되고 1990년 청동대불로 다시 조성됐다. 국난 극복, 민족화합, 월드컵 성공개최 및 세계평화의 기원을 담아 2002년 이 청동대불에 개금 불사를 한 것이 현재의 금동 미륵 대불이다. 높이 25m인 이 미륵불은 단일 불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드는 데 청동 116t이 들어갔다.
법주사 천왕문은 현존하는 천왕문 중 가장 크고 넓다. 법주사의 금강문과 법주사 팔상전(국보 55) 사이에 있는 불사의 산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높이 5.7m, 둘레 1.8m의 천왕상을 2구씩 4구를 만들어 세웠다.
국내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되는 사천왕상은 보통 갑옷을 입고 보검 등 정체성을 드러내는 물건을 손에 들고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려 악귀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모습을 표현한다.
팔상전은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으로 신라 성덕왕(720년) 때 조성된 국보이다. 이 건물은 외부에서 볼 때 5층이지만 실내는 층이 없이 트인 단일 공간이다.
내부 중앙 기둥의 4개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 8폭이 걸려 있다.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화궁 원궁`은 법주사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오른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건물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보물 제15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 제작된 `사천왕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8각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높이 3.9m에 이르는 이 석등은 지대석, 하대, 중대(간주), 상받침대, 상대(화사석),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상대의 각 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석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입니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 이고, 법신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입니다.
법주사 진흥각
진흥각에는 개산시조 의신선사를 비롯하여 진표율사, 태고선사, 변암선사 등 진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통보전은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떼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금 복원하였습니다. 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고, 주심포계의 단층 건물로 사모지붕에 절병통으로 조성된 특유의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각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희견보살입상`은 신라 33대 성덕왕 19년 (720년)경에 조성된 입상으로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며,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보살상은 앞가슴 부분의 법의가 벌어져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근육이 조각 자체를 강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의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높이 약 2m, 보물 제1417호.
`법주사 철솥`은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보물 제1413호.
벼락 맞은 느티나무가 수피 부분에 영양분이 오가는 통로가 살아 있어 생명을 유지해 간다는 사실도 신기한 대목이다. 쌍사자석등, 석연지, 사천왕석등, 희견보살상 등 석조 문화재는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의 탓으로 조각의 세부 묘사가 적잖이 흐려졌지만, 예술적 걸작이 발산하는 미감은 여전히 생생했다. 유물과 유적이 많은 법주사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와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