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8일
근현대 선지식으로 선불교를 중흥시킨 만공(1871~1946), 문인·여성운동가·불교 사상가였던 김일엽(1896~1971), 서예적 추상 화가로 한국보다 유럽 화단에 더 알려졌던 고암 이응노(1904~1989) 등 큰 인물들의 족적이 새겨진 곳. 덕숭산 수덕사를 찾아본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에 위치하고 있다.
넓다란 주차장은 2,000원의 주차비를 받고 있다. 주차장에서 수덕사 입구는 상가로 번잡하다.
상가에서 우측으로 휘어진 길을 따라 돌아 가보니 시야에 장엄한 문이 가득 찬다. 배가 불룩한 배흘림기둥 4개가 나란히 서서 머리 위의 지붕을 튼실하게 받치고 있는 선문이다. 이제는 매표소가 안내소로 변하였다.
선문 윗쪽으로 부도군이 있으며,
조금더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 경내 들머리인 일주문에는 ‘德崇山修德寺’라고 쓰인 현판이 붙어 있다.
일주문 지나면 선미술관과 이 화백이 머물렀다는 수덕여관은 아래위로 나란히 서 있다. 이응노는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 붙인 독창적 세계를 창조했다. 선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수덕사를 방문할 때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입구에 자리 잡은 수덕 여관이다. 수덕사 쪽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집 앞으로 흘러가는 수덕여관은 소담하고 궁색하지 않은 농가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화가 고암 이응노 화백이 1944년 구입해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그가 떠난 뒤에는 부인이 여관을 운영했다. 사적지에는 고암이 조각한 암각화 2점이 남아 있다. 그는 1967년 간첩 조작 사건인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69년 프랑스로 다시 떠나기 전 바위에 추상화 2점을 조각했다.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그림이 역동적이다. 무엇을 그린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라고 했단다.
예전에는 넓적한 바위 옆면에 이응로 화백이 새겨 놓은 암각화를 보면서 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줬는데 예산군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이 바위에도 울타리를 해 놓았다.
수덕사 금강문
수덕사 사천왕문
덕숭산 수덕사는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백제 위덕왕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난다. 마지막 계단이 시작되기 전 황하정루가 기세등등하게 서 있다.
황하정루 왼쪽에는 만공 스님이 세운 7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황하정루 오른편에 만공기념관이 보인다.
황하정루의 1층을 지난다.
열댓 개의 계단을 밟고 오르자, 기대했던 법당 대신 거대한 성벽이 나를 맞이한다. 5m 이상은 돼 보이는 돌벽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루를 통과하면 바로 법당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덕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돌벽이 나타났다. 틈 없이 맞춰진 돌들은 아마도 산의 경사를 보완하기 위해 쌓은 듯하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교하게 다듬어진 계단을 오른다.
드디어 수덕사의 심장부인 대웅전 권역이다.
범종각
법고각
국보 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한국 건축사와 건축미학 측면에서 중요하다. 358년 창건된 수덕사의 대웅전을 1937년 해체 수리할 때 건축 연대를 명시한 묵서명이 발견됐다. 이로써 수덕사 대웅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건축 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공인됐다. 건축 시기는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3대 목조 건물'로 꼽힌다.
대웅전 앞 3층 석탑. 웅장한 절집들에 비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한 탑이다. 하지만 통일신라 탑 특유의 균형 있는 비례를 갖췄다.
700여 년 세월과 더불어 대웅전을 고색창연한 빛으로 물들이는 요소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은 한 칸 더 많은 4칸의 특이한 구조를 가진 맞배지붕 집이다. 강한 배흘림기둥과 기둥 위의 주심포가 조화를 이룬다. 평이한 빗살문 장식의 세 쪽짜리 분합문이 이와 조촐하게 어울린다. 주심포란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 하나만 있는 건축 기법이다. 공포가 여럿 있으면 다심포라고 한다.
맞배지붕의 묘미는 대웅전의 옆모습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맞배지붕의 간결한 선과 이를 받치고 있는 목부재의 구도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붕과 보가 연결되는 지점에 가로 세로로 짜 맞춰 넣은 부재들이 옆쪽 벽면의 공간을 절묘하게 분할한다. 직선과 곡선이 혼재된 기하학적 무늬에서 간결함과 함께 은근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무심한 듯 세심하고, 소박한 듯 화려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목조건물로 꼽힌다.
대웅전 법당 내부에는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모셔져 있다.(보물 조선 인조 17년(1639) 제작)
관음보살과 관음바위.
삼성각
명부전
대웅전 왼편 관음 바위를 지나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산속 암자인 정혜사로 향하는 길이다.
능인선원이 있는 정혜사로 올라가는 1천80 계단이 놓인 계곡 옆길은 나무 그늘이 짙어 뜨거운 태양을 가려준다. 구도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쉼이 없다. 수덕사 2대 방장인 벽초스님이 놓은 것이다. 인간의 백팔번뇌를 열 번 내려놓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청량한 물소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네 개의 면에 불상을 조각한 석불이 나온다. 1983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유일의 사면석불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방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다시 돌계단을 한참 오르니 산 중턱에 초가집이 나타난다. 만공스님이 머물렀던 소림초당이다.
소림초당입구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만공이 세운 암자 향운각 인근에는 수덕사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거대한 석불이 있다. 1924년 만공 스님이 조성했다는 관음보살입상이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높이가 25척에 달한다. 만공선사가 꿈에서 석가세존을 만난 뒤 조성했다는 미륵불 입상이다.
메인 등산코스인 대웅전부터 정혜사에 이르는 1,080개 돌계단은 벽초스님이 손수 다듬고 가꾼 것으로 정교하고 튼튼하다.
만공 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만공탑.
만공탑 바로 위에는 정혜사가 있다.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는 만공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정혜사에 다다르니 하얀 푯말로 "이 곳은 수도도량이니 출입을 삼가 합시다"라고 적혀 있었다.
108번뇌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1080 계단을 오르는 구간은 정혜사를 끝으로 그뒤 아담한 밭이 반긴다. 구슬땀을 흘리며 108개씩 열 번을 오르면서 속세에서 묻은 때들을 벗어내려는 마음은 사실 경치에 취해 힘들지 않게 올라 왔다.
전월사로 가는 갈림길에서 바로 덕숭산정상으로 향한다. 덕숭산은 해발고도 495m의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막바지 올라가는 길이 꽤 가팔라 숨이 찼다.
덕숭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다른 산들에 비해서 그렇게 뛰어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덕사주차장 ~ 수덕사대웅전 ~ 벽초스님 1080 돌계단 길 ~ 정혜사 ~ 정상 (약 2.0km 절구경 포함 1시간 30분 안팎 소요)
정상에서 가야산만 보여준다.
하산길에 능인서원으로 가본다.
정혜사 능인선원은 담장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는 걸로 만족한다.
수덕사 경내로 들어오는 순간 그 웅장한 규모에 자연스럽게 놀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단편적으로 비칠 수 있는 화려함은 경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수덕사가 가진 드러내지 않은 위엄은 오히려 고고함과 절제미를 느끼게까지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시사철 수덕사를 찾는 이유다.
돌아 가는 길에 수덕사에서 약 6.6km 떨어진 이응노화백의 생가지를 찾아본다.
화가의 꿈이 시작된 곳. 희망과 열정으로 꿈을 키우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간 자리. 평화통일과 인류화해의 염원. 그의 예술혼이 함께하는 곳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