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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경주 독락당

2024년 8월 21일

옥산서원을 관람하셨다면 꼭 보셔야 할 곳 독락당입니다. 조선 전기 문신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잠시 기거할 때 지은 별장 건물로 1964년 보물로 지정된 건물입니다. 독락당은 `홀로 즐기는 곳이다`라는 뜻입니다.

 

 

 

옥산서원 좌측 담장끝에 독락당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습니다. 독락당까지는 700m입니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0-3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락당에도 주차장이 있습니다.
흔히들 아무리 좋은 곳도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 급속도로 황폐화된다고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굴곡진 소나무가 나를 반긴다.
옥산서원에서 오솔길을 따라 150m쯤에 옥산구곡 중 하나인 제4곳 `공간`이라는 안내판을 봅니다.
`서원의 북쪽으로 일 마장되는 곳에 물이 평평하게 흐르는데, 마을 사람들이 제방을 그 아래에 쌓아 물빛이 마치 거울 표면과 같았다. 예로부터 공간이라 일컬었다. 그 글의 뜻은 기이하니 이를 일러 사곡이라 하였다.` 안내판 내용을 옮겨 적었는데, 지금은 수풀에 가려져 있는 상태다.
이언적(1491~1553) 조선 중종 때 성리학의 이설을 정립한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의 이설을 정립하여 이황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영남학파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호는 회재다. 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해 경주 주학교관이 되었으나 인종이 죽자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를 올렸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돼 강계로 유배돼 성리학 연구에 힘쓰다가 죽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사후 종묘에 배향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경주 옥산서원 등 여러 서원에 주향되었다.
녹색이 울창한 숲을 걸어갈 때 가슴 벅찬 환희가 찾아온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가락 끝에서부터 짜릿한 쾌감이 스멀스멀 몸을 향해 몰려든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숲이 깨끗하게 정화한 공기를 폐 속에 가득 채워 본다. 이런걸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행복이다.
오솔길 끝에 옥산천과 나란히 지은 담장 축대 암반과 합쳐져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한 폭의 한국화 같은 독락당이 나온다. 정쟁에 휘말리며 불혹의 나이로 정치에서 물러나 낙향한 그는 둘째 부인이 살고 있던 독락당의 각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고쳐서 현재의 독락당을 만들었다.
독락당 정문으로 가서 고택의 진면목을 두루 관람하기로 한다. 흙담사이로 삐죽이 나온 나무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세 칸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문간 마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담장으로 둘러싼 문간채가 있다.
청지기 등 측근 노비들이 거처하던 문간채.
대문 안으로 후손들이 지은 집 행랑채를 경청재라 한다.
경청재 편액
행랑채 뒤편으로 여성들의 주거공간인 안채가 들어서 있다. 경주 지역의 사대부 가옥의 보편적인 특징인 'ㅁ' 자형 공간구성을 취하는 안채는 후손의 거주 지역으로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행랑채와 공수간 사이의 문을 지나면 독락당과 공수간 사이의 골목길이 인상적인데,
토담과 토담 사이의 흙길을 지나면 옥산천(자계천)에 이른다. 투박한 흙담과 흙담 사이의 흙길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발길을 돌려 사랑채 문을 밀고 들어서면 다른 사대부 집의 사랑채와 달리 기단과 마루를 한껏 낮춘 독락당과 정면에 걸린 편액 '옥산정사'(玉山精舍)가 눈에 들어온다. 독락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다. 지붕은 팔자 모양으로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옥산정사의 편액은 이황이 썼고, 마루 안쪽의 독락당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다. 이언적이 자연과 벗하며 책을 읽던 공간인 독락당은 마루와 사랑방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방 서쪽에는 한 칸의 작은 방이 붙어 있는데, 책을 쌓아두는 책방인 동시에 독락당과 안채를 연결하는 매개공간이다. 안채 건물과 토담으로 둘러싸여 외부로 향하는 시선이 차단된 독락당은 자연을 향해서는 열린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나무로 살을 만든 창을 달았다. 옥산천 냇물을 바라보기 위한 공간 구성이다. 이채롭운 살창 사이로 들리는 계곡 물소리로 마음의 묵은 때가 홀연히 씻기는 듯하다. 홀로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다.
독락당에서 뒤편 별채 앞 약쑥 밭을 지나,
독락당 별당으로 들어 가는 협문이 보인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독락당의 별당인 계정(溪亭)이다. 동쪽의 계곡으로 면한 부분은 정자인 계정이고,
계정에서 'ㄱ'자로 꺾어 지은 2칸 방은 양진암(養眞庵)이다. 양진암은 정혜사 승려와 교류했던 이언적이 계정을 찾은 정혜사의 스님이 머물도록 배려한 공간이라고 한다.
계정에는 눈에 띄는 두 개의 편액이 있다. '계정(溪亭)'이라는 편액은 한석봉, '양진암(養眞庵)'이라는 편액은 퇴계 이황의 글씨다.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의 글씨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옥산천(자개천)에 놓인 자연암반 위에 기둥을 세워 날렵한 모습으로 지은 계정은 2칸 대청과 1칸 온돌방으로 이뤄졌고, 쪽마루를 덧대어 계자난간을 두른 소담하고 작은 집이다.
이언적이 직접 설계하고 이름 붙인 독락당은 홀로 은거하며 자연과 벗하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자 한 주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넓은 반석 위로 흐르는 옥산천과 계곡에 면한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계정', 운치 있는 흙 돌담과 어우러져 자연과 더불어 하나 되는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난간에 기대어 계곡을 내려다보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흐르는 개울과 숲을 내 정원처럼 감상할 수 있는 계정의 참모습은 계곡 쪽으로 나가야 볼 수 있다. 독락당에서 계정으로 길게 이어지는 토담과 관어대에 우뚝 솟아 있는 계정, 그리고 맑은 개울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아름다운 풍광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계정 앞마당 우측에는 저서를 보관하는 서고가 있다.
이언적이 직접 쓴 저술.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 진수팔규(進修八規), 봉선잡의(奉先雜儀)로 모두 5종 13책이다. 보물 정식 명칭은 ‘이언적 수고본 일괄’이다.
보물 `해동명적`은 신공제(1469∼1536)가 신라부터 조선 초까지의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를 모아 1515년경 목판본으로 간행한 법첩이다.
안과 밖의 구분을 느낄 수 없는 계정마루에 앉으면 자신의 몸이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을 갖게 된다. 바로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아늑하게 둘러싼 숲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자신과 학문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한 혼자이니 집 이름처럼 혼자라도 즐거움이 넘쳤을 것이다.
넓은 반석 위로 흐르는 옥산천과 계곡에 면한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계정'(溪亭), 운치 있는 흙 돌담과 어우러져 자연과 더불어 하나 되는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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