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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경주 옥산서원

2024년 8월 21일

1871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사액서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이 철폐됐다. 당시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아 있는 서원 중 9곳이 세계 유산인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되게 된다. 회개 이언적이 죽은 지 20년 뒤인 1574년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는 곳입니다.

 

 

 

경주 옥산서원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에 위치하고 있다.
주차장 위쪽에 옥산서원 유물보관소는 국보, 보물 등 다 수의 유물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산서원 안내판에는 1572년 경주 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세웠다고 설명돼 있다.
주차장에서부터 이어지는 길은 세계유산이라고 알리는 표지석 길과, 옥산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있다. 옥산천 옆 길을 따라 들어 간다. 꽤 수령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매미 소리를 따라 흙길로 걸어 들어가면, 맑고 시원한 계곡 물과 오랜 세월에 깎인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옥산 구곡' 중 3곡이다. 외나무다리, 용추폭포, 세심대가 있다. '옥산 구곡'은 이언적 사후에 이가순이 옥산천을 따라 9곳을 선정 명명했단다.
서원 입구의 이색적인 주변 경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원 옆에는 계곡이 펼쳐져 있는데,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검은 너럭바위가 층층이 이어져 있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 서원으로 들어가 본다. 외나무 다리는 옥산 서원 정문인 역락문으로 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서원을 찾으라는 의미란다.
많은 물이 바위 사이로 부서지면서 콸콸 쏟아져 흐른다. 용추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청아하다.
고목과 계곡물소리, 너럭바위 등 절경이 찾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선조 들은 일찍부터 혼자 사는 즐거움을 터득한 듯하다. '탐욕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기 위함일까.
퇴계 이황이 바위에 직접 쓴 '세심대'.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라는 뜻이란다.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에 두 번째로 나오는 이 문장을 두 글자로 압축해서 정문 이름을 지었다. 옥산서원의 ‘역락문(亦樂門)’이다. 명필 한석봉 선생의 글씨인데 공부하러 온 사람을 반기는 뜻이란다.
옥산서원 정문 연락문 통과하면 2022년 보물로 지정된 무변루(無邊樓)가 나온다.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이는데, 위층에는 대청마루가 있다.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 앞으로 옥산천에서 서원 안으로 끌어들인 물이 흐른다.  한국의 서원 건축양식에 누마루 형식이 처음 도입된 건물이라고 한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인 무변루의 건물 창은 나무문이다. 정문인 역락문쪽에 외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문을 닫으면 외부 시선이나 소음이 차단된다. 계곡 물소리가 공부에 방해되었던 때문이 아닐까.
무변루 동쪽 끝자락에서 민구재의 후측과 고직사의 후면이 길게 보인다.
무변루의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간다.
무변루 좁은문을 지나 돌계단에 올라서면 강학공간의 마당이다. 마당은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 사이에 기숙사인 동·서재가 끼워진 형식으로 구성된 정방형의 공간이다.
2층으로 이루어진 무변루는 총 7칸이지만 마당 쪽에서는 5칸으로 인식되는 묘한 건물이다. 통나무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누마루의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에는 1칸의 온돌방이 있다. 온돌방 옆 1칸의 누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구인당 앞마당 좌우에는 기숙사인 동·서재가 강학 공간을 이룬다. 서재인 암수재(闇修齋)는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묵묵히 수양한다'는 뜻이며,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무변루 맞은 편 중앙에는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온 구인당(求仁堂)이 있다.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3칸의 대청마루와 대청 양쪽의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구인당은 명필로 당대를 주름잡던 대가들의 친필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강당 처마에 걸린 편액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굳세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이 편액은 1839년 화재로 구인당이 소실돼 증수하면서 다시 써서 헌종이 하사한 것이다. 대청에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 편액은 문신이자 명필로 알려진 이산해의 글씨다. 창건 당시 편액으로 추사 김정희의 편액보다 크기가 작다. 두 개의 편액은 보통 편액과 달리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인데, 이는 임금이 하사한 사액편액이기 때문이다. 마루 안쪽에 걸려 있는 편액 '구인당'은 무변루와 함께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 구인당 뒤편은 제향 공간이다. 평소엔 잠겨 있는 체인문(體仁門)이다. 그 안에늕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와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으로 주위를 담장으로 둘렀다.
서원관리를 하는 고직사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에는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등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담장 넘어에서 들여다 본다.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다.
사당의 담장 밖 왼쪽에는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서쪽 담장 밖에서 옥산서원 안를 들여다 본다.
옥산 서원은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를 띄고 있지만, 자연의 일부처럼 자리 잡아 불편한 느낌이 없다. 여름은 여름인지라 쉬지 않고 들려오는 매미소리와 함께 여름의 정취가 물씬 풍겨왔다.  자연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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