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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경주 양동마을

2024년 8월 21일

경주 양동마을은 600년 전 만들어진 여주 이씨 집성촌으로 멋스러운 한옥들이 낮은 구릉과 조화를 이루며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지난 2010년 대한민국 열 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국보, 보물, 민속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 볼거리가 많아 1993년에는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었다. 특히 양동마을은 200년 이상 된 고가 54호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28번국도 호국로 인동삼거리에서 양동마을길을 700여m따라 들어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비는 무료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알리는 표지석이 반긴다.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는 양동마을문화관에서 마을의 역사를 알아 본다. 문화관 내부에는 양민공 손소의 초상화부터 조선시대 여인들의 안방과 선비들의 사랑방, 양동마을이 품고 있는 문화유적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이어진다. 대대로 이어오는 민속놀이를 재현한 콘텐츠와 마을 주요 고택들의 모형과 설명이 전시관에 마련되어 있다.
양동마을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집성촌이다. 경주(월성)손씨와 여주(여강)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가 풍덕류씨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이씨는 찬성공 이번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풍습이 있었다. 두 집안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서로 좋은 터를 잡아 집을 지었고, 오랜 세월을 거쳐 두 가문의 건조물들이 양동마을 곳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140여 가구 270명의 후손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
주요 탐방코스를 둘러보자면 반나절이 훌쩍 넘는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면 필수 코스는 꼭 둘러보고 가자.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 보물 제412호인 향단,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인 서백당을 염두에 두고 7개의 코스를 걸으며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의 다양한 전통 가옥들을 관람하겠습니다.
양동문화관을 나오면 4,000원으로 매표를 한 후, 매표소 길 건너 마을 어귀 산기슭의 안락정으로 올라간다.
안락정 옆 초가집은 서당의 뒷바라지를 맡았던 사람이 살던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안락정은 조선시대 정조 4년(1780)에 건립된 손씨 문중의 서당이다. 담장 안으로 백일홍, 감나무, 향나무 등이 곧은 기개를 뽐내고 연못이 풍취를 돋운다.
안락정에서 되돌아 나와 매표소 우측으로 가면 마을 입구에 기와집 지붕을 한 이채로운 모습의 학교도 자리하고 있다. 1913년 개교한 무려 100년이 넘은 역사의 양동초등학교다. 초등학교의 전신이면서 서당 역할을 한 심수정(1560년 건립)과 안락정(1780년 건립)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인 이언적 선생 등 많은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했다.
초등학교와 마을사이에 있는 점방으로 유네스코실사단이 지적하였던 건물이지만 이 또한 역사다.
마을에 들어서면 높은 지대와 낮은 지대에 있는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보인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실제로는 마을이 더 넓고 가옥도 많은데, 산등성이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서당까지 포함하면 건물이 약 165채에 이른다. 수백년 된 고색 창연한 54채의 옛 기와집과 이를 에워싼 110여채의 초가가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다.
양반들의 집은 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의 하인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는 형태로 돼 있다. 마을의 규모, 보존 상태, 문화재 수, 아름다운 자연환경 등으로 볼거리가 많다.
첫번째 코스인 하촌 방면은 양동마을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 어귀 산기슭의 안락정을 시작으로 이향정, 강학당, 심수정을 둘러보는 20분이 소요된다. 산길을 따라 고택을 알리는 담장이 눈에 들어 온다.
이향정 고택 사랑채. 주민이 거주중으로 안채에는 들어가지 못했음. 이향정은 조선 숙종 21년(1695)에 지었다고 하며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1708~1783)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이향정고택 담장너머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와가와 초가집이 들어온다. 긴 역사의 정취를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매표소에서 얻은 팜플렛을 보면서 고택을 찾아가는 것은 보물을 취득한는 것 같다.
산 위쪽의 종가와 사당을 언덕 아래쪽 초가집들이 둘러싸고 있는 양동마을의 구조는 조선시대 엄격했던 신분과 위계질서를 보여준다. 고즈넉한 초가집은 한나절 구경하는 사람들에겐 재미있는 볼거리겠지만, 정작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래서 함부로 아무집이나 들어가서는 안돼고 몸가짐도 바르게 행동하여야 한다.
심수정은 조선전기 여강이씨 문중에서 건립한 누정이다.
이곳에서 이언괄은 형님인 회재 이언적 대신 노모를 모신 분이다.
ㄱ자형 행랑채와 함께 자리 잡은 이 정자는 ㄱ자형 평면으로 흡사 양반집의 별당채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심수정 윗쪽으로 강학당 가는길.
강학당은 중요민속자료 제83호로 지정된 곳으로 고종 4년(1867)에 세워진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인접한 초가와 함께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거림지역에 포함된 두곡고택 지역으로 가본다.
두곡고택은 조선후기 이언적의 6대손인 이시중 관련 주택이다. 양동마을 대표적인 대가옥의 하나로 넓은 터에 토담을 둘러싸고 남향으로 대문간채를 둔 것이 특징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전면에 남향한 사랑채가 있고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광 1칸과 마구간 2칸으로 구성된 마구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아래채 · 안채와 더불어 ㅁ자형 몸채를 이루는데 아래채 측면인 남측면과 사랑채 서쪽 끝 사이에 쪽문을 달아 안마당으로 출입한다.
두곡고택 안채
두곡고택 담장 오른쪽 위로 올라가면 동호정이 나온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두곡고택의 전경.
동호정
두곡고택 뒤로 수졸당 이의잠(1576~1635)의 재실.
영당이 있다.
내곡코스는 근암고택, 상춘헌, 사호당, 서백당, 낙선당, 창은정사, 내곡정을 둘러보는데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된 독특한 가옥 구조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근암 고택은 양동마을 상춘헌 고택과 나란히 붙어 있다. 1780년(정조 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전체 배치는 一자형 문간채가 서남향으로 있고,
그 안쪽에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서남향하고 있다. 그리고 一자형 헛간채가 안채 부엌과 나란히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서북쪽 산언덕 위에는 사당채가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근암고택에서 바라보는 마을입구의 전경이다. 오랜 삶을 이어온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마을답게 수 백년된 고택에는 작은 건물 하나에도 고유의 이름이 있고 숨은 뜻이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상춘헌 고택 이 집은 이덕록 선생이 살던 집으로 그의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 선생의 호를 붙여 '상춘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6년(1730)경에 지었다고 하며, 양동마을에서 일반적인 튼 'ㅁ'자형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ㅡ'자형의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송첨 종택(서백당) 서백당은 이탁원 가옥과 함께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 가운데 하나다. 양동마을에서 가장 위쪽 골짜기인 안골의 깊숙한 곳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월성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다고 한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사랑 대청에 걸린 편액인 '서백당(書百堂)'을 따 2007년에 '양동 서백당'으로 택호를 변경했다. 서백당(書百堂)은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입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납니다.
집에 들어서서 오른쪽을 바라보자 풍성한 가지를 양옆으로 뻗은 향나무가 서 있다. '양동의 향나무'로 불리는데, 수령이 500년이 넘은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서백당에서 무첨당을 찾아간다. 물봉골끝자락 물봉고개다. 이 고개에서 무첨당으로 내려간다.
물봉골 코스에서는 양동마을을 한눈에 바라보며 마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보물 제411호로 지정된 무첨당등 대성헌을 관람한다.
무첨당 서북측에 위치한 대성헌은 조선시대 영조 8년(1732)에 건립된 목조 가옥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3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이다.
보물인 무첨당을 찾았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 (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가옥은 회재 이언적의 부친인 이번(1463~1500)이 살던 곳이다. 이번은 손소의 사위로 양동마을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대청 벽에는 '左海琴書'(좌해금서·영남에서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있다. 집권 전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한다.
집은 살림채, 제청, 사당 등 각각 시기를 달리 해서 지어진 세 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으나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물봉골입구에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물인 '향단'(香壇) 협문이 나온다. 향단은 외관상 무척 화려하고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한국의 많은 건축가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건축물 중 하나다. 관가정과 더불어 마을 초입에 자리해 양동마을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건물이다.
향단은 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1543년(중종 38)경에 지어 준 살림집이라고 전한다.
내부구조도 화려하고 세밀하게 고려해 지은 빼어난 주택으로 보물 412호로 지정돼 있으나 사랑채만 볼 수 있다.
관가정 가는 길
보물로 지정된 관가정은 조선 중종 때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살림집이었으며,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보물 442호인 관가정은 조선 성종 때 명신 우재 손중돈 선생이 살던 집입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었고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일품이다.
집은 살림채와 사당으로 구성되며, 관가정의 사랑채 앞에는 옆으로 누운 큰 향나무가 있다. 고택 앞마당에 향나무를 심는 것은 양동마을의 전통이라고 한다.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 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사랑채 앞으로 담장은 최근에 건축된 것이다.
관가정 안채
손중돈 이조판서 교지
손소 적개공신교서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였다.
관가정 사당
사당 안에는 손소 적개공신화상이 있다.
관가정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인근을 흐르는 하천과 아랫마을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관가정은 풍경이나 가옥 곳곳을 음미하고 탐색할 수 있는 문화공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쉬운 지역 관과정에서 향단을 당겨본다. 향단을 바라보면 중층적이고 화려한 가옥 외관이 눈에 띈다.
손종로 정충비각
정충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손종로와 그의 충성스러운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려 1783년(정조 7)에 세워졌다. 주인인 손종로의 것만이 아니라 노비의 비까지 함께 세워 비각이 둘인 점이 특별히 감동을 준다.
양동마을을 오가다 보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맞은편 고택을 바라보는 정취가 다양했다. 이러한 가옥들의 공통점은 현대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살아 움직이는 유산 양동마을을 관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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