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2일
경주시 원화로 102에 위치하고 있는 동궁과 월지 입장시간이 오전 9시로 아침시간을 활용해 주변을 산책하기로 한다. 신라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는 계림(사적 제19호), 신라왕궁의 별궁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 그리고 동양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국보) 등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경주는 유적지마다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고 도시 곳곳에 계절꽃을 한가득 식재해 산책하기 가장 좋은 도시다. 경주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사거리에서 원화로를 따라 동궁과 월지 방향으로 내려간다.
좌측으로 토성인 월성이 보인다. 월성은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이다. 월성은 201년(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월성의 남쪽에는 자연 하천인 남천이 흐르고, 월성의 북쪽에는 인공 해자를 만들어 방어를 강화했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외곽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 놓은 연못이다. 월성 북쪽의 해자는 7세기까지 땅을 파고 물을 채운 수혈해지였다가, 이후 돌로 시설물을 만들어 물을 가둔 석축해자로 변천하였다.
테뫼식 토성 월성안으로 들어가 본다.
월성은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품은 곳으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월성 성곽은 현재 아름들이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어찌보면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1,000여년의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성곽 따라 뿌리내린 울창한 소나무 숲에 앉아 숨도 고른다.
월성성곽에 봉분같이 보이는 곳이 나온다. 지붕 위쪽에는 환기구가 세 개 보인다. 석빙고는 반지하 구조로 되어 있고, 지붕에는 흙을 두껍게 덮고 잔디를 심어 열기를 차단하는 동시에 냉기를 보존하게 했다.
석빙고는 보물로서 경주에 있다고 해서 신라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만들어진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
석빙고 안을 들어가 보면 높이 5.4m, 너비 6m, 길이 14m의 얼음 보관소가 있는데, 겨울에 꽁꽁 언 강에서 얼음을 캐어 와 여름까지 보관했다고 한다.
석빙고 인근에 세워진 반월성을 상징하는 초승달 조형물. 성곽 앞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은 사랑 속삭이는 연인들 차지다. 마음을 예뻐지게 만드는 풍경. 천년 묵은 시간의 향기보다 더 진한 연인의 사랑이 여기 있다.
월성 산책로는 계림으로 이어진다.
계림은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이다.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이었는데, 이 설화로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린다. 탈해왕 9년(65년), 조그마한 금빛 궤짝이 시림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궤짝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바로 김알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그는 왕위를 받지 않았고 그의 6대손에 와서 김씨가 처음으로 왕(13대 미추왕)이 된다.
전설 한자락 걸친 숲에는 신령스러운 자태의 고목들이 가득하다. 이 천년의 숲에는 물푸레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등 수령 지긋한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계림은 숲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버드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활엽수가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계림 비각은 1803년(순조 3)에 세운 6 각형 비각으로, 안에는 계림의 내력과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새긴 '경주 김알지탄생기록비'가 세워져 있다.
숲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주위는 습지이다. 울창한 숲이지만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이다. 키 큰 나무 그늘이 숲 전체에 넓게 드리워 있어 별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숲 정원에는 맥문동이 빼곡히 들어차 보랏빛 장관을 이룬다.
계림 안에 있는 무덤은 17대 내물왕(356~402)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계림에서 첨성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황남동 대형건물지가 보인다.
국보로 지정돼 있는 ‘경주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천문관측시설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 문화유산이다.
첨성대를 구성하는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을, 꼭대기까지 30단의 석층은 한 달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아래 12단은 12달, 24절기를 상징한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심오한 천문의 원리를 담은 건축물이다.
첨성대 일대는 경주시가 꽃단지로 조성해 사계절 내내 꽃구경하기 좋다. 경주시가 지역 화훼 농가 육성과 지원의 일환으로 사적지에 꽃을 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첨성대를 돌아서 동궁과 월지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MBC드라마 동이 촬영지가 나온다.
현재 발천은 월성 인근의 고대 수로로서 발굴이 한창 진행중이다. 발천은 대체로 월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렀는데, 월성의 북쪽을 가로로 지나며 월성의 서쪽에 위치한 계림을 지난 후 남쪽으로 꺾어 남천에 합류하였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가 즉위하던 날 사량리의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로부터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자태와 얼굴은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고 한다. 이에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는데, 이 때문에 그 내를 발천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동궁과 월지에 왔다. 동궁은 태자가 살던 별궁,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이다. 동궁과 월지 입장시간 오전 9시부터이며 입장료는 3,000원, 주차비 무료다.
동궁과 월지 주변을 산책하면 마치 과거 신라시대의 왕궁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곳은 원래 신라의 별궁 터였다.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 미미하게 남겨진 흔적과 역사 속 문헌을 토대로 복원된 사적지다.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년)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쪽과 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일제강점기엔 철도가 지나가는 등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해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깔끔하게 단장된 동궁과 월지에 입장하면 연못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천년왕국의 역사 속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동궁과 월지는 구불구불한 형태와 기하학적 직선이 어울린 연못을 가진 대표적인 삼국시대 정원유적이다.
복원된 월지에서 입수와 배수시설은 7세기 통일신라의 원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다. 동남쪽에서 입수되는 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큰 섬 바로 앞에 소리 내며 떨어졌다가 양쪽으로 갈라져 연못 전체로 퍼진다. 배수시설은 중간 섬이 있는 북쪽에 돌비석처럼 생긴 수문이 건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