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6일
전남 순천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선암사는 한국 대표 사찰 중 하나다. 529년 아도화상이 개산하여 고청량산 해천사라고 명명했다는 설과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해 선암사라 이름 지었다는 설이 함께 전하는 천년고찰이다. 한국 불교 종단 중 조계종 다음으로 규모가 큰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이기도 하다. 선암사는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 보은 법주사,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와 더불어 2018년 한국의 산지승원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산지승원으로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 가치를 느껴봐야 할 사찰이다.
선암사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이르는 1.3㎞ 정도의 길은 우리나라의 산사 건축이 진입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확인케 해준다. 길을 따라 걸으면 가장 먼저 무지개 모양의 아치가 또렷한 승선교가 나온다. 승선교는 숙종 39년(1713) 호암대사가 6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전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아치형 석교다. 아래 부분에서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이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승선교는 정유재란 때 소실된 선암사를 중건한 호암 선사가 1698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선교는 바로 뒤에 있는 강선루와 함께 짝을 이루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는데, 신선이 내려왔다 올라갔다는 뜻의 ‘강선(降仙)’과 ‘승선(昇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선이 내려오는 누각이라는 뜻의 강선루는 승선교 위쪽 길에 세워져 있다.
승선교 홍예와 함께 빼어난 풍경을 보여주는 강선루는 바로 누문이다. 사찰의 출입이 건축의 목적이고 대개는 일주문을 지나 위치하는데, 선암사만 이렇게 일주문 밖에 있는 점이 신기하다.
풍수의 창시자인 도선국사가 862년 직접 조성했다고 전하는 `삼인당`이란 이 연못은 선암사가 조금 비스듬한 곳에 있는 형세를 바로잡고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기 위해 일주문 앞에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연못 오른쪽 고목 세 그루도 비보풍수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심은 비보풍수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삼인당 연못의 삼인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사상을 나타낸 것이란다.
삼인당연못 좌측으로 찻집 선각당이 있으며, 선암사 일주문은 우측길을 따라가야 한다.
일주문 앞에 하마비도 보이고,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의 특이한 점은 두툼한 양쪽 기둥 옆에 담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담은 양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지 않고 짧게 끊어져 있다. 그리고 일주문 다음에 있어야 할 천왕문을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주산이 되는 장군봉이 악귀의 범접을 막는 천왕문의 역할을 대신한단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면 범종루 좌측으로 못보던 성보박물관이 건축되어 있다.
범종루로 오르는 계단의 해태상의 난간이 이체롭다.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가 나오고,
범종루 아래를 통과해 들어오면 ‘육조고사(六朝古寺)’라고 쓴 현판이 걸린 만세루가 나온다. 건물 이름에 누각을 일컫는 글자 ‘루`가 쓰였음에도 그 모습은 누각이 아니다. 만세루는 선암사의 본당인 대웅전으로 가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의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불이문(또는 해탈문)은 누각의 형태로 지어져 그 아래로 진입이 이루어지나, 선암사에서는 만세루 양옆으로 대웅전 앞마당으로 진입한다.
만세루 우측으로 종각이 있으며,
만세루와 신검당 사이로 들어가면,
쌍탑이 있는 중정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을 마주하게 된다. 대웅전은 선암사의 본당이지만 다른 건물을 압도할 만큼 화려하거나 크지 않다. 무엇보다 대웅전은 선암사로 들어오는 여정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대웅전 뒤편에 있는 또 다른 영역으로 가는 시작점이 된다.
마당에 삼층 석탑 두 기가 고즈넉한 모습으로 서 있다. 두 탑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면 한 사람, 또는 한 그룹의 석공들이 만든 것 같다. 신라 시대 때의 양식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석탑은 깨지고 닳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숱한 화재에 중창에 중창을 거듭한 가람들과 달리 이 석탑들은 선암사의 오래된 시간을 오롯하게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동서3층석탑 앞에 서서 대웅전을 올려다 보면, 선암사의 대웅전은 꾸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다. 소박한 지붕, 격식은 갖추었으되 단청이 보이지 않는 처마와 공포, 올곧은 모습으로 기단과 지붕을 연결해 주는 민흘림 기둥의 모습을 보노라면 친근감마저 든다. 수차례 화재와 소실, 중건과 또 다른 화재와 소실 등을 겪은 대웅전은 1824년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실내 법당도 소박한 모습이다. 협시불이 없이 주존불인 석가모니불만 모셔져 있다. 귓볼이 턱선까지 내려온 부처님 좌상과 탱화, 만불상 정도가 전부다.
자세히 보면 선암사에는 석등이 없다. 선암사의 빈번한 화재와 관련이 있다. 영조 35년의 큰 화재 이후에는 화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 이름을 '청량산해천사'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23년 또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을 비롯해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탔다. 선암사는 석등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내에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화재에 대비했다. 모두 6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2개의 연못은 적묵당과 성보박물관을 지으면서 메꾸어졌다.
대웅전 오른쪽 지장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전각이다.
지장전을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지장전 뒤 우측으로 삼전이 자리한다.
대웅전 뒤편으로 넓직한 돌담길을 사이에 두고 팔상전, 불조전, 조사전 등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대체로 대웅전 뒤편은 좁게 막혀 있어 뒷모습은 보기 힘든데 반해, 선암사 대웅전 뒤편에는 넓직한 공간과 화단이 있어 잘생긴 뒷모습을 여유있게 볼 수 있다.
원통전 뒤와 각황전 담 옆에는 수령 350∼650년의 매화가 자라고 있다. 선암매로 불리는 이 노거수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봄철 선암사에서는 백매, 홍매, 청매를 모두 볼 수 있다.
선암사 각황전은 각황전 자체보다 선암매, 선암사 매화로 더욱 유명한 지점이다. ‘각황전과 선암매’라는 이름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돌담과 지붕이 각황전이고, 돌담에 나란히 서 있는 거무튀튀한 나무들이 매화들이다.
각황전 선암매 골목길을 따라 올라 가면 선암사 중수비가 있는데,
중수비와 삼나무 사이는 사시사철 포토존으로 유명한 곳이다.
선암사 중수비
대웅전 뒤로 다시 돌아와 팔상전을 보고 있다.
팔상전에는 석가여래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와 정조 4년에 제작된 화엄경 설법 모습을 그린 '화엄경변상도' 등이 있다. '화엄경변상도'는 우리나라에 3폭이 남아 있는데, 나머지 2폭은 순천 송광사와 하동 쌍계사에 있단다.
불조전
불조전에는 과거 7불과 미래 천불의 불조인 53불을 모셨다.
조사전
조사전에는 선암사의 개창자와 중창자, 중수자 등 역대 주지들이 영정이 모셔져 있다.
팔상전과 불조전 사이에 좁은 계단을 오르면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것처럼 '날갯짓'을 하는 원통전을 만나게 된다.
선암사 원통전은 1689년 호암대사가 중창하였다. 조계산 배바위에서 관세음보살 친견을 위하여 백일 기도를 드린 호암대사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바위에서 떨어져 죽으려 한다. 이때 누군가 나타나 호암대사를 구하였는데, 그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다고 한다. 호암대사는 원통전을 중창하고 친견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다. 정조가 후사를 이을 자손이 없자 눌암대사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후 순조가 태어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후에 순조가 내린 '대복전'이란 친필현판이 걸려 있다. 호암대사가 지은 원통전은 1759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현재의 원통전은 1824년 눌암스님의 중수를 거쳐 1923년 재중수한 것이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수령 600년의 백매화.
원통전 위 칠전구역은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칠전구역은 진영각, 달마전, 미타전, 산신각, 그리고 응진당이 있는 곳인데,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은 진영각이다. 진영각은 뜻 그대로 큰 스님들의 인물화(진영)들을 모아둔 곳이다.
달마전 응진당 삼신당 진영당.
달마전 쪽문앞 골목길의 모습이다. 좌측담장이 원통전 뒷 담장이다. 선암사는 절집보다는 마당과 연못을 갖춘 고풍스러운 가옥이 빼곡히 들어선, 운치있는 마을을 연상시킨다. 잘 지어진 정자나 지조 높은 양반가옥같은 전각 둘레에 돌담을 쌓고 작은 나무문을 달았다. 돌담들은 이어져서 돌담길이 되었다. 돌담을 따라서는 500년 넘은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작은 정원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첨성각과 장경각 옆에 연못.
첨성각
첨성각 내부
삼성각
삼성각 내부
백제 성왕 527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에 터를 잡고 통일신라 도선국사가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하고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했다. 왕자의 신분으로 천태종을 창건했던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할 때 심은 게 600년 된 ‘등 굽은 소나무 와룡송’이다. 와룡송은 삼성각과 무량수전 사이에서 한쪽 줄기는 하늘로, 다른 한쪽은 땅을 기어 다니는 듯한 형상으로 묘한 자태를 뽐낸다.
설선당 서쪽의 쌍지.
적묵당, 창파당 앞.
선암사 뒷간은 화장실 건물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됐을 만큼 건축미가 남다르다. 1700년대에 지어졌다는 추정이 있으나 첫 건축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재래식이지만 화장실 깊이가 깊고 통풍이 잘되도록 설계돼 냄새가 나지 않는다. 탐방 필수 코스 중 하나로, 흥미를 자극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운치 있는 뒷간이라고 하는 선암사 해우소에 걸려있는 정호승 시 ‘선암사’를 생각하며 승선교 다리 밑 계곡으로 내려간다.
선암사의 여러 건물이 각자의 질서를 가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오래된 마을’, ‘수도자의 도시’를 떠올린다. 아마도 선암사와 같은 동네가 있다면 그 동네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도시처럼 각자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을 원할 때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