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5일
많은 왕들의 릉을 다녀 왔지만 사람에게 친숙한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화성의 융릉과 건릉은 처음 와 본 것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의 이야기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 문학 작품의 소재로 쓰인 분들이다. 그만큼 각각의 인물 이야기, 시대적 배경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많았던 것 같다. 영조실록에는 1762년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자(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간이 흘러 왕위에 오른 정조 역시 아버지(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왕릉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융건릉 입장시간이 오전 9시 부터다. 입장료 1,000원. 주차비 무료.
탐방 전 융건릉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역사문화관은 방문은 필수다. 역사문화관에서 무료 역사 해설을 듣고 가면 한층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융건릉은 장조(사도세자)와 왕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무덤인 융릉, 그리고 근처에 붙어있는 장조의 아들이자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 무덤인 건릉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융릉과 건릉 모두 두 능 전부 두 사람 이상을 하나의 봉분에 매장한 합장릉 형식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합장릉은 조선왕릉 전체 42기 중 8기만 있을 정도로 희소하단다.
역사문화관과 건너편에 융릉의 ‘재실’이 있다.
재실에서 볼 수 있는 보물은 높이가 4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입구에서 얼마 안걸었는데 갈림길이 나온다.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융릉이고 왼쪽이 건릉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을 먼저 들르는 편이 예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융건릉에서는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든 쭉 뻗은 소나무와 참나무를 빼곡히 조경한 산책길을 걸을 수 있다. 융건릉뿐만 아니라 조선왕릉 어디서든 울창한 나무와 마주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도심 한복판에서 산림욕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조산시대에 만들어진 돌다리면 이 또한 문화재다.
돌다리를 건너 좌측을 본다 연못이 보인다. 왕의 능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관문이 있다. 융릉을 향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원형연못 ‘곤신지’다.
조선왕릉 못 대부분은 각진 모양인데 이곳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보여 둥글게 조성했다는 후문이다. 곤신지는 정조가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내세에서 임금이 되라는 의미로 만들었단다.
곤신지를 지나면 문자 그대로 붉은색을 칠한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은 출입의 기능보다 상징성을 보여주는 문으로 예부터 이 문 앞에서는 지체 높은 사람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전해진다. 홍살문 뒤로는 조선왕릉 진입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얇은 돌인 박석을 깔아 만든 향어로가 펼쳐진다. 향어로는 제향 시 향과 측문을 들고 들어갈 때 쓰는 길 ‘향로’와 임금이 걷는 길 ‘어로’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관람자들은 향로가 아닌 어로로 걸어야 하는데 이때 잠시나마 임금의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좌측으로 능을 지키는 수복들이 머무르는 수복방이 있으며, 향어로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꼿꼿이 서 있는 정자각과 마주할 수 있다. 봉분 바로 아래에 있는 조선 왕릉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고무래 정(丁)자와 비슷해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정자각에 다가가면 비로소 융릉의 특이점을 눈치챌 수 있다. 대개 조선왕릉은 능, 정자각, 홍살문을 일직선상에 배치한다. 이와 달리 융릉은 정자각과 능이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비껴 있다. 이와 관련한 정확한 연유가 밝혀진 바는 없으나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인데 그의 무덤 문까지 막지 말라’는 정조의 어명이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능에는 접근할수 없어 울타리 밖에서 관람하여야 한다.
융릉을 둘러보기 전 이곳의 간략한 역사를 훑자면 원래 사도세자의 무덤은 화성이 아닌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었다. 이 얘기를 하려면 신분에 따라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가 능(陵), 원(園), 묘(墓)로 달라진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통상 왕과 왕후 무덤은 능,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원, 그 외는 묘라 부른다.
융릉은 묘에서 원을 거쳐 능에 이르기까지 걸린 기간만 무려 137년이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 '수은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조는 즉위 후 이를 높여 '영우원'이라 했다가 178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조는 11년간 12차에 걸쳐 능행을 했다. 혜경궁 홍씨는 세상을 떠난 뒤 현륭원에 합장됐고 1899년 이곳이 능으로 높여지면서 현재의 융릉이 됐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이 보인다. 비각 안에는 현륭원과 융릉에 대한 비석이 있다.
비각 안에는 현룡원 표석 비문, 융릉 표석 비석이 있다.
정조가 묻혀있는 건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비가 살짝 내리는 한적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
융릉에서 반대편으로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길을 따라가면 건릉에 다다른다.
건릉 역시 수복방,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 능의 기본 구성은 같다. 다만 능 조성 시기와 배경이 다른 만큼 무석인이나 문석인 등 석물의 개수와 형태가 확연히 다르다.
1800년 정조도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 동쪽 언덕에 그의 능인 ‘건릉’을 조성했다. 이후 1821 정조의 부인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합장을 위해 건릉을 개봉했는데 부장품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에 풍수 논란이 일어 건릉을 현재의 자리로 천장해 온 뒤 효의황후를 합장했다.
건릉 표석 비문.
융릉과 건릉을 포함해 한국에 있는 조선왕릉 40기는 역사적,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현재는 보호를 위해 능을 오를 수 없어 사실상 일반 관람객은 석물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 가끔 능에 오르려는 분들이 있는데 보호받는 국가 유산으로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다. 또 이곳에서 요즘 유행하는 건강 운동인 맨발 걷기를 하시는 방문객도 있다는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