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 화성. 수원화성을 짓기에 앞서 정조는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임금이나 왕후의 무덤)을 명당으로 꼽힌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꾼다(지금의 융릉). 당시 이곳에는 수원읍과 고을 관청들이 있었기에 수원읍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수원 화성이다. 성곽을 따라 5.7km의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연무대안내소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가다 행궁을 거쳐 다시 이곳까지 토목건축의 백미를 관람하기로 한다.
수원화성은 외적과 전쟁을 치른 적은 없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 때 대부분 파괴돼 방치되다가 1975년부터 5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이처럼 화성의 복원이 가능했던 것은 축성하면서 공사기록을 ‘화성성역의궤’라는 9권의 책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기록 덕분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등재까지 가능했던 것이다.창룡문 주변에서 바라본 장면이다. 관람을 위해 처음 출발했던 동장대(연무대), 국궁체험장, 그위로 동북공심돈이 위치하고 있다.정조는 화성의 축조 임무를 정약용에게 맡겼고 정약용은 1794년 공사에 착공한 후 3년 만인 1796년에 화성을 완공했다. 완성된 수원화성의 성곽둘레는 5.7㎞이며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었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할 때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으로 들어와 행궁에서 1박을 하고 팔달문으로 나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에 성묘했다.동장대(연무대)는 화성을 지키는 정조의 친위대였던 장용영 병사 5,000명이 무예를 훈련하던 현장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성곽을 따라 그끝에 동북공심돈이 보인다.공심돈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로 1층과 2층에서는 서양식 화포 블랑기를 배치해 뚫린 구멍으로 적을 공격하도록 했고, 꼭대기에서는 적을 관측할 수 있었다.동북노대창룡문은 수원화성의 동쪽 문으로 ‘동쪽을 지키는 신성한 청룡’을 상징한다고 한다.수원화성에서 위계는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순이다. 성역의궤 도설에도 이 순서로 기록돼 있다. 문루 규모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중층이고 창룡문과 화서문은 단층이다. 홍예, 육축, 옹성 크기도 위계에 따라 차이를 둔다.동포루동이치에서 바라본 전경으로 봉돈(봉수대)이 보인다.남수문으로 가는 길에서는 멋진 봉돈(봉수대)을 볼 수 있다.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 적의 침입을 알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설이다. 보통 봉수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는데,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 동남각루다.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걷다 보니 어느새 남수문에 도착했다. 성곽에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면 바로 수원천이다.수원천에 있는 남수문은 길이 29.3m, 폭 5.86m, 전체높이 9.33m로 하부는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다.남수문 상층부에는 적의 침입 시 안에 들어가 포를 쏠 수 있도록 포사가 설치돼 있는데 비상시에 수백 명의 군사가 들어갈 수 있다.남수문에서 남치까지 미복원 구간이다. 수원남문시장지역으로 복원이 힘든 구간이다. 화성의 남은구, 남서적대, 남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 등 다섯 곳이 미복원으로 남아 있다.옛사진 남공심돈의 모습이다.수원화성의 백미 팔달문은 차가 돌아나가는 로터리 역할까지 하고 있다. 여기서 보아도 저기서 보아도 고고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이곳에서 화성행궁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치에서 서장대까지 화성의 일부분을 놓치고 간다.정조는 1776년 즉위 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묘소를 현재의 융릉으로 옮기며 새로 건설한 신도시로 화성 안에 위치한다. 행궁은 재난 발생 시 왕이 머무르던 임시거처인데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조선의 행궁들 중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기능 면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나서 1년에 한 번꼴로 열세 번이나 화성행궁을 다녀갔다. 정조가 머물지 않는 평시에 화성행궁은 관아 건물로 쓰였다.정조의 효심과 정약용의 실학이 열매를 맺어 완성된 화성행궁은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파괴됐고 1996년 1단계 복원공사가 시작돼 2003년 10월 일반에 공개됐다.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좌우로는 남영군과 북군영의 건물이 있으며,정문 신풍루안으로 들어가면 넓다란 마당끝에 화성 행궁의 두번째 문인 좌익문이 보인다.좌익문 우측으로 집사청.좌익문으로 들어가기전 좌측으로 비장청과 서리청이 있다.좌익문 안으로 들어가면 긴회랑과 이어진 중양문이 나온다. 좌익문과 중양문 안 공간은 ㅁ자형태의 회랑들이 담장역활을 하고 있다. 화성 행궁은 전국의 수많은 행궁중에서 그 규모는 물론 격식도 최대한 왕궁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일례로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에 가기 위해서는 3개의 문인 신풍루, 좌익문, 중양문을 통과해야 한다.중양문안으로 들어가면 경룡관과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숭당이 나온다.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이다.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렸다.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침소. 정조는 어머니를 쉽게 보살필 수 있도록 ``장락당`을 자신이 머물던 봉수당과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지었다.장락당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던 건물이다.임금님의 수라상.복내당 앞쪽에 있는 건물로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정조대왕이 쉬던 처소다.젊음을 보존한다는 의미의 난로문안으로 들어가면 정조대왕이 이곳에서의 노후를 꿈꾸고 지었다는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정조대왕의 모친 혜경궁 홍씨 회갑연(진찬연) 기간 중 과거시험을 치른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건축물이다.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 향나무 뒤로 득중정이 보인다.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다.낙남헌 전방으로 담장으로 둘러싸인 화령전이 있다.화령전 외삼문안으로 들어가면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정전(운한각)이 보인다.운한각 우측으로 건물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정조대왕의 어진(초상화)을 봉인한 화령전이다. 화령전은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정조대왕의 사당인 이곳에선 역대 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다.득중정 우측으로 산기슭에 화성행궁 후원을 조성했는데 그곳에 세운 정자다. 행궁이란 왕이 지방에 행차해 잠시 머무를 용도로 만든 궁으로, 화성행궁은 조선행궁 건축의 백미로 통한다.화성행궁을 관람한 후 행궁 좌측길을 따라 가면 효원약수터가 나온다.약수터에서 계단을 따라 화성의 서장대로 올라 간다.서노대와 서장대(화성장대)의 모습이다.화성에는 지휘소 격인 장대가 두 개 있는데 그중 한곳인 서장대다. 화성장대의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정조대왕은 1795년(정조 19) 윤 2월 12일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서울 수비 주야간 훈련을 직접 지휘했다고 한다.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서장대는 수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다.서장대에서 서이치로 가는 화성길. 서장대에서 화서문까지는 내리막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선으로 뻗어 있는 성곽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한다.서2치는 서포루와 서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서포루 주변 억새밭.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특히 서북 공심돈(보물 1710호)은 축조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데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북서적대와 장안문에 왔다.수원화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장안문은 그 규모도 웅장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크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라는 뜻으로 또 다른 서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안문이 정문이라는 것은 왕이 수도인 한양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는 문으로 쓰였기 때문이다.북동치에서 바라본 곡선을 그린 높다란 성 끝에 북동포가 보인다.장안문을 지나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북수문(화홍문)’이 나온다. 북수문과 동북각루의 전경이다.수원화성의 북수문은 화홍문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홍예문 수문 위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형태다.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아치형으로 만든 홍예문을 일곱 칸 이어서 수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모습이다.북암문에서 ‘방화수류정’을 보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언덕 높은 곳에 있어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동북각루라고도 한다.북암문에서 동북포루를 보고 있다.동북포루에서 북암문 성밖의 전경을 보고 있다.화성관람의 시작점 연무대가 보인다. 병사들이 군사 훈련을 했던 연무대, 군사 지휘소를 장대라고 하는데, 이곳은 동쪽에 있어 동장대라고 부른다.동암문으로 동장대(연무대) 옆에 있다. 수원화성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효심이 가득했던 정조대왕의 숨결을 따라 걷거나 정약용에 집중해서 수원화성의 다양한 토목건축물과 과학기술에 몰입해도 좋지만 그저 수원 시내를 조망하며 걷고 옛 성곽과 도심의 빌딩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모습을 즐기고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