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5일
용주사는 융릉과 건릉의 원찰(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 )로 고려시대에 소실한 신라시대 갈양사라는 절터에 지어진 절이다. 사도세자의 현륭원(융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질 때 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 함께 창건했으며 당대 최고 승려 장인이 건축에 참여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사찰을 관람하면서 역사 공부도 함께 병행한다.
일주문 대신 입구 역할을 하는 사천왕문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에 세워졌다. 우측벽에 용주사 안내도가 걸려있다.
동방을 다스리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 우락부락하게 조각한 사천왕상이 불순한 마음으로 사찰내로 들어가는지 노려 보는것 같다.
정조대왕은 1789년 수원부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모신 융릉(현륭원)을 조성하고, 이듬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용주사를 창건했다. 용주사는 조선 후기에 국왕의 지휘 아래 창건된 유일한 원찰이다. 10년 후 정조대왕이 서거하자 융릉 권역 내에 건릉이 조성됐고, 용주사는 융건릉의 원찰로 거듭났다.
용주사의 이름도 정조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에 용이 여의주를 품은 꿈을 꾼 이후, 절의 이름을 용(龍)자와 여의주를 뜻하는 주(珠)자를 합해서 용주사로 정했다고 한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좌측으로 효행박물관이 있다.
정조대왕이 기증한 ‘불설부모은중경판’을 비롯, 보물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품 등 용주사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효행박물관 좌측에는 고려시대 화성 용주사 오층 석탑이 있다.
오층석탑 반대편에는 최근에 세워진 부모은중경탑 모습이다.
사천왕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홍살문’이 등장한다. 본래 홍살문은 사찰이 아닌 궁전·관아·능·묘·원 등 앞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문이다. 용주사는 창건 목적 자체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황후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내기 위한 능침 사찰이라 홍살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홍살문 안내판에 있는 사진으로 1887년 용주사의 모습.
홍살문을 지나면 용주사의 거대한 대문 삼문이 있다. 삼문은 보통 대궐이나 관청 앞에 세우는 문이다. 궁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건축양식을 사용해 원찰의 격을 높였다. 삼문에는 문자 그대로 드나들 수 있는 세 개 문이 있는데 그중 중앙 문은 과거 임금만이 사용했던 문으로 최근까지 닫혀 있었다. 최근 바뀐 주지 스님의 뜻에 따라 2022년부터 이 문을 개방했고 방문객은 임금의 기분을 느끼며 중앙 문을 드나들 수 있다.
삼문 옆으로 행랑이 줄지어진 줄행랑으로 일반사찰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삼문안으로 진입하면 넓은 마당에 오층석탑과 천보루가 나타난다.
오층석탑에는 부처님의 사리 2과가 봉안되어 있다.
오층석탑 좌측으로 불음각과 요사채가 보인다.
5층석탑 뒤에는 높은 사다리꼴 주춧돌이 매력적인 누각 천보루의 모습이다. 천보루 역시 궁궐이나 관아에서 자주 볼 법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천보루 1층 통로를 통과하면 단을 쌓은 위에 대웅보전이 나온다.
대웅보전은 용주사의 주불전으로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지만 외부 단청을 제외하면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18세기 불전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아울러 장대석 기단과 원형주좌를 둔 사각의 초석, 지붕의 취두와 용두, 양성바름 등 시공에 정성을 기울여 능침 사찰로서 건물의 격을 나타낸다. 다포 양식의 공포와 초각 수법은 창건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보여준다.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면 목조 삼세불 불상 뒤에 김홍도가 그렸다는 `삼세여래후불탱화`가 관람자를 압도한다. 후불탱화는 석가불, 좌우에 약사불,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주변에 여러 보살 등을 그린 불화 형식이다. 대웅보전과 삼세여래후불탱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나타유료(요사채), 천보루, 만수리실(선방)이 마당을 감싸고 있다.
대웅보전 좌측으로 법종각, 칠불전, 시방칠등각이 자리한다.
범종각 내부에는 국보로 지정된 범종(국보 제120호)이 있다. 종 몸체 앞뒤로 삼존상 등을 뛰어난 조각 기법으로 새겨 고려 종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힌다.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에는 여의주를 문 용이 두 발로 종 꼭대기 판을 딛고 전체를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연꽃연못
천불전 내부에는 천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법화경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시방칠등각은 칠성과 산신, 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대웅보전 뒤 우측으로 호성전, 지장전, 관음전의 전각이 있다.
용주사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호성전에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헌경황후 그리고 정조와 효의황후 네 사람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호성전은 2020년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했으나 다시 복원했다.
호성전과 지장전 사이 뒤로 전강대종사 사리탑을 조성해 놓았다.
뚜렷한 개성의 불상 30여 개를 볼 수 있는 지장전은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중앙에는 황금빛 옷을 입은 지장전 묵조지장보살좌상이 인자한 얼굴로 앉아 오가는 이를 맞고 있다. 또 양옆으로는 염라대왕·송제대왕·진광대왕 등 시왕상이 늘어서 있는데 그 기세에 걸맞은 힘찬 기운을 내뿜고 있다.
관음전밑으로 수각은 약수로 공양하는 장소다.
죽은나무에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지옥의 문턱에서 생환을 표현한것 같다.
화성 용주사는 중심 영역인 삼문, 천보루, 대웅보전을 가운데 일렬로 두고 승당, 선당(스님들의 살림 공간), 좌우 익랑(정전 양쪽에 날개처럼 빠져나온 건물)은 똑같은 규모의 동일한 형태로 마주보고 대칭되게 배치했다. 이 같은 배치와 공간 구성은 창건 당시 모습을 대체로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후기 능침 사찰의 배치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조선은 국가의 기본에 엄연히 ‘억불 숭유’가 서 있는 나라였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사찰을 함부로 짓고 왕실에서 보호하는 ‘원찰’로 운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왕으로서의 권력과 조선의 변화를 백성과 공유하는 정치적 전략을 쓴다. 국가가 불교를 탄압했지만 여전히 공자님보다는 부처님이 더 큰 존재로 마음에 살아있던 많은 백성들의 진심 역시 용주사의 창건을 가능하게 해 주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