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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

고성 건봉사

2025년 7월 29일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남쪽 끝자락 자리하고 있는 건봉사를 찾아가는 길은 46번 국도상에 있는 광산리~ 민통선 구간(6km)은 이동중인 차량을 멈추지 말라는 경고문이 보인다. 만약 차량이 도로상에 멈출시 군병력이 출동한단다. 바짝 쫄아서 건봉사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와 일제 침략기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과 인연이 깊은 호국불교의 도량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봉사 내 사명당과 만해기념관(왼쪽). 좌측에 깨어진 사명대사기적비와 복원된 비석이 놓여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승병을 일으켜 훈련을 시켰고. 만해는 일제 강점기 때는 항일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봉명학교를 사찰 내에 설립·운영하였다. 사명대사기적비편은 사명당 유정(1544~1610)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비석이다. 강원도 관찰사였던 남공철이 비문을 짓고 허질이 글을 썼다. 사명대사가 건봉사 낙서암에서 법화경을 배웠으며, 왜적에게 되찾아온 치아사리를 건봉사에 안치하였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적비는 1912년 이후 파손되어 전해오다가 2017년 복원되었다.
건봉사는 국내 4대 사찰 중 하나 였으며,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해 원각사라 이름 붙였다. 이후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중수해 서봉사라 개칭했고, 공민왕 7년(1358년) 나옹화상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란 이름을 되찾았다. 세조 10년(1464년)에는 어실각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으로 삼았다. 규모나 사찰의 내력으로 보아 건봉사는 한국불교의 대성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등 강원도 일대 대부분의 사찰들을 말사로 거느린 3,183칸의 대찰이었다. 하지만 1878년 산불에 사찰은 전소됐고, 이후 복원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폐허가 돼 현재는 신흥사의 말사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측의 `석가불치상입탑비`에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양산 통도사에 안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이 사리를 약탈한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반환받아 건봉사에 안치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절 입구에 `불이문`이라는 누각이 있다. 누각의 돌기둥 네 개에는 붉은 색 칼 문양의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불교에서 '예리한 지혜의 칼'이란 뜻으로 사찰 수호를 상징한다. 하지만 전능의 능력을 가진 금강저도 막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19세기 후반 큰 불로 많은 건물이 소실됐고. 남은 수백 칸도 한국전쟁 당시 모두 잿더미가 된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불이문`과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돌다리 '능파교' 그리고 우측의 팽나무 뿐이었다.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에 새져진 '미륵불'을 쓴 주인공이란다.
불이문 우측에 있는 팽나무.
불이문을 뒤로하고 좌측으로 극락전 지역이 보인다. 그 위로 두 갈래. 맞은 편 길은 적멸보궁으로 통하고, 오른쪽 능파교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십바라밀석주 뒤로 종각이 있으며,
종각 뒤로 6.25전에는 극락전을 비롯해 열 채의 건물이 있던 자리다.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를 건너야 한다. '고해의 파도를 지난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30여 개의 돌이 반원을 이루고. 네모난 돌을 그 위에 수평으로 쌓은 석축 양식으로 1904년 세워졌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는 건봉사 대웅전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 숙종 30~33년(1704~1707년)에 축조됐으나 영조 21년(1745년)과 고종 17년(1880년)에 무너진 것을 최근에야 복원했다.
능파교를 건너면 바라밀 문양이 새겨진 두 개의 '십바라밀 석주'가 반긴다. 각 문양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열반에 들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의미하는데 건봉사의 일주문인 셈이다.
2층 봉서루 지붕밑 현판에는 `금강산건봉사`라 써있다.
봉서루를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내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 5과를 일반인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대웅전 옆 보안원에 모셔져 있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당시 건물과 국보급 보물들이 모두 소실돼 안타깝지만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봉서루로 돼 돌아와 누각 안으로 올라간다.
봉서루에 전시된 한국동란 직후의 사진을 보면 불이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12년 촬영된 건봉사 전경
건봉사 전경
1912년 촬영 유점사 전경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이며, 금강산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란다)
유점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유점사 산영루.
1929년 촬영 유점사 전경
`장안사 대웅보전 삼존불` 장안사는 표훈사 아래에 있는 내금강의 거찰로 514년에 진표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1912년 촬영. 6.25전쟁시 소실.
장안사 범종(1912년 촬영).
1912년 촬영 사성지전 전경 (장안사는 대웅보전과 서성전을 두 축으로 삼아 양 구역에 비슷한 모양으로 건물이 배치되는 독특한 형식으로 지어졌단다)
장안사 대웅보전
건봉사는 조선시대에도 유점사, 정양사 등 금강산의 절들을 거느리는 강원도 지역의 본사였고 고종(재위 1863∼1907년)대 화재기록에 의하면 거의 3,000칸이 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오늘날 보는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건봉사에 들러 꼭 가볼 곳은 등공대다. 건봉사 대웅전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간다.
등공대는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발징화상이 신도 정신·양순 등과 함께 최초로 염불만일회를 개설한 곳. 기도결사에는 31명의 승려와 1,820명의 신도들이 참여했다. 당시 기도에 참여한 염불승 31명은 극락왕생했다. 1920년 돌무덤이었던 이곳에 한 신도가 100원을 보시해 탑을 세웠다. 건봉사의 영역은 사방 십리에 이른다. 하지만 절터와 등공대를 제외하곤 대부분 출입 금지 구역이다.
연방죽
등공대는 연방죽에서 왕복 50분 거리다. 굳게 잠겨진 두 곳의 철문을 통과하는 길은 사람의 발길을 타지 않은 전형적인 오솔길. 길 양쪽은 지뢰밭이다. 이곳은 과거 민통선 지역으로 묶였으나 10여년 전부터 건봉사 종무실에 사전 통보하면(10명 이상) 안내를 받아 갈 수 있다. 즉 아무나 갈 수 없는 지역이다.
아쉽지만 지뢰밭에서 어떤일이 일어날지 몰라 발길을 돌려 장군샘으로 왔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을 훈련시키며 몸을 씻게 한 ‘장군샘’이다.
어째거나 한잔 마셔본다.
오던 길을 되돌아 능파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간다. 건봉사의 옛 절터였던 이곳에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 3과가 보관돼 있다.
방생장계(放生場界) 모든 생명체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지역 용사활지, (龍蛇活地) 용이건 뱀이건 차별없이 제 나름으로 살아가는 땅이라고 음각 돼어 있는 석주 안으로 들어 간다.
건봉사 낙서암지역이다.
건봉사 산신각.
산신각 내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인 적멸과, 보배같은 궁전이란 보궁, 발걸음 소리만 들리며 고요하기만 하다.
적멸보궁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뒤편으로 가본다.
적멸보궁 옆 건물 독성각.
건봉사의 적멸보궁 뒤편 사리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 3과가 봉안돼 있다.
극락전 지역의 왼쪽 산등성이에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해 고고하게 서 있는 300년된 ‘소나무’에 가 볼 만 하다.
건봉사는 여러 차례 재난으로 훼손되었던 탓에 건축이나 유물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재난의 역사는 바로 민족사의 어려운 고비들을 말하는 것이기에 역사적인 현장으로서 가슴을 여미게 한다. 또한 그 위치를 보면 우리 미래를 위한 염원의 절이자 유적지임이 틀림없다. 산중 사찰 특유의 고요함과 숲길이 어우러져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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