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여행 구파 백정기의사 기념관 안골태호 2022. 6. 2. 09:51 2022년 5월 14일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에 위치하고 있는 구파 백정기의 기념관을 관람하며, 의열사에 모셔져 있는 영정에 참배한다. 백정기의사 기념관 건너편에 있는 충혼비. 백정기 의사는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라고 외쳤던 사람이다. 화장실 소변기 위에 적혀있는 문구....ㅋ 의열사 홍살문 백정기의사 어록비 백정기의사 동상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에서 아버지 백사순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일찍 부친을 여의었다. 수원 백씨인 선생은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성장하였으며 호는 구파, 자는 용선, 수원 백씨로서 가정 환경이 어려워 주경야독하였지만 남달리 총명하여 사서삼경은 물론 신학문에도 능통하였다. 의열사 숭의문 추모비 와 창건기념비 백정기의사 순국 기념비 숭의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의열문이 보이고, 우측으로 청의당이 있으며, 좌측으로 기념관이 자리한다. 먼저 의열사에 들어가서 묵념을 올린후 기념관에 전시된 기록물을 관람하기로 한다. 의열사 의열문 구파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의열사` 구파 백정기의사 영정 참배후 기념관 내부를 관람한다. 백정기의사는 15세가 되던해 우리나라가 강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비록 어리지만 소년의 가슴에도 일제에 대한 울분과 이에 대한 저항 의식 및 구국일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향리인 정읍으로 내려와 만세세위를 선도하였고, 동지들과 서울, 인천을 오가며 일제기관의 파괴와 방화, 요인암살 등을 계획하다 일경의 추격을 받고 그해 8월 중국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을 근거지로 수차례 국내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 일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의사의 기지로 무사히 나와 1922년에 북경으로 재차 망명한다. 1924년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은신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일왕 처단과 수력발전소 파괴 등을 계획하였으나 불의의 관동대지진으로 뜻을 못 이루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북경에 온 의사는 이회영, 신채호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크게 감화되었다. 의사는 보다 더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1924년 6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다. 무정부주의는 국가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나 독립이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이의 실천을 위해 폭력테러리즘적인 방법을 도입하였다. 의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고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 기치하에 통일 단합하고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공동 투쟁하여야 된다는 연대항쟁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된 이 연맹에 가담 활동하였다. 1933년 의사는 상해 공동조계 내의 `육삼정`이라는 고급일식점에서 일본 군부의 거물들이 중국의 군별들과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즉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 가 주중일본공사 유길명에게 미화 2천만불 상당의 거금을 주어 중국 국민정부내의 친일분자와 고급장성을 매수하여 항일유격대와 독립군을 탄압시키고자 그 회의를 1933년 3월 17일에 연다는 것이다. 연맹은 곧 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참여할 대원을 뽑았는 바 의사는 강력히 요청하여 이강훈, 원심창 의사 등과 같이 3인이 육삼정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을 만들고 왜적을 처단한다는 계획을 만들었다. 폭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때 사용되었던 것과 동형으로 백범 김구 주석이 주고 간 것으로 사용하고 투척연습과 현장 확인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거사당일 `육삼정`부근 송강춘이라는 음식점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 이미 사실이 누설되어 급히 밀어닥친 일 중 합동경찰에게 거사직전 체포되어 상해에서 취조를 받은 후 같은해 7월 5일 일본 장기로 압송되었다. 백 의사 등은 장기지법의 판결을 받았는데 백의사와 원심창 의사는 무기징역, 이강훈 의사는 15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백 의사는 1934년 6월 5일 적의 땅인 일본의 감옥에서 폐병이 악화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순국하였고, 원심창과 이강훈 의사는 복역 중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삼열사 추모화보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6일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더불어 조국으로 옮겨져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룬 후 현재는 선생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에 안치되어 있다. 공유하기 게시글 관리 궁금하면 가보자 '전라북도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읍 전봉준 유적 (0) 2022.06.02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 (0) 2022.06.02 전봉준장군공원 과 내장산조각공원 (0) 2022.05.31 전설의 쌍화차거리 (0) 2022.05.21 용산저수지의 미르샘다리 (0) 2022.05.21 '전라북도 여행' Related Articles 정읍 전봉준 유적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 전봉준장군공원 과 내장산조각공원 전설의 쌍화차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