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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행

해남 공재고택

2021년 3월 24일

해남  공재 고택(윤두서 고택)은 조선 후기 회화의 개척자로 "윤두서의 자하상" (국보 제240호)를 그린 윤두서의 공재 고택(중요 민속문화재 제232호)을 답사한다.

 

공재고택의 담장은 높기도 하다.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쌓아 올린 돌들, 좁다란 곡목길은 어린시절 향수를 불러 온다. 기단을 막돌로 높고 두텁게 쌓고 그 위에 흙돌담을 쌓았다. 웬만한 바닷바람에 끄떡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 뵌다.
입구에서 바라본 공재의 고택 전경. 해남윤두서고택은 조선후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이다. 고산 윤선도가 큰아들을 분가시키고 살기 위해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이 가옥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후에 증손인 윤두서가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윤두서는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과 함께 조선의 3재로 일컬어지는 선비 화가이다. 윤두서고택은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을 알 수 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이다. 이 고택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종 11년(1670)에 지어졌고, 순조 11년(1811)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립당시에는 동쪽의 문간채로 들어가 우측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 48칸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 13칸, 곳간채 3칸과 안채 오른쪽으로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다. 마당 좌측으로 덩그러이 노거수 향나무가 그옛날의 영화를 알고나 있는지?
곳간과 안채 사이로 좁은 통로가 있고 행랑채 오른쪽에 돌계단을 앞에두고 담장에 둘러있는 사당(세심당)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이다.
사당 처마밑에 그려진 벽화
사당에서 바라본 안채의 바깥쪽이다.
윤두서 (尹斗緖, 1668년 6월 28일 ( 음력 5월 20일 ) ∼ 1715년 12월 21일 ( 음력 11월 26일 ))는 조선의 화가 이다. 자는 효언, 호는 공재·종애, 본관은 해남 이다. 그의 생전 주요 거주지는 한성 과 전라도 해남 이었다. 윤선도 의 증손이며, 윤이후의 넷째아들이다 숙종 때(26세)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쟁 이 심하던 시기였기에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동식물 등의 그림에 뛰어났다. 조선 후기 의 화단의 선구자로 지목받으며, 현재 심사정 (玄齋 沈師正)· 겸재 정선 (謙齋 鄭歚)과 함께 조선의 ‘3재(三齋)’라 불린다. 작품으로 〈노승도〉, 〈산수도〉, 〈 자화상 〉 등이 있다. 서화 뿐만 아니라 유학 , 천문지리 , 수학 , 병법 등 각 방면에 능통한 실학적인 태도는 가풍으로 전해졌다. ........증조할아버지 윤선도가 은거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끊임없이 세상에 내보이고 세상의 기회를 엿본 인물이라면 공재는 친한 벗들과 형이 정치적 핍박을 받으며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좌절하여 재능을 스스로 포기하고 갈등과 고뇌를 반복한 끝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인물이다. 내적 갈등과 고뇌는 그를 지치게 하였다. 이런 내적 갈등이 고스란히 표현된 것이 45세에 그린 그 유명한 자화상. 분노를 앞세운 채 수염을 곤두세우고 졸지 않겠다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은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고 압도한다. 그러면서 그간 살아온 고독과 고뇌와 슬픔이 담겨 있어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좌절, 체념,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곳간과 안채 사이로 좁은 통로가 있다.
좌측으로 화장실과 정면에 곡간채가 보이고, 우측으로 몸을 틀면,
13칸으로 되어 있는 안채는 "ㄷ" 자형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동쪽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이다.정면에서 바라본 집의 형태는 해풍을 피하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으로 되어있다. “이는 조선 후기인 1700년대의 건축수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평면구성, 두리기둥과 구부러진 퇴보나 대들보의 견실한 결구등이 특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3칸 규모의 곡간채.
곡간채에서 바라본 전경.
고택 뒤로는 작은 장독대도 담장이 둘러져 있다.
토방과 안채 후원 사이에 물길이 길게 나있다. 도랑같은 물길사이에 작은 다리를 놓아,
부엌에서 장독대를 드나들게 하였다.
특이하게 ㄱ자 꺽어 지는 곳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채 ‘청우재(聽雨齋)’ 편액의 글은 "빗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인가. 녹우당이 초록 색감으로 눈을 시원하게 한다면 청우재는 귀를 맑게 한다.
편액 "능통"이라는 당호가 의학, 병법, 시서화, 지리, 음악등 다방면으로 능통했던 공재 윤두서를 기리기 위한것으로 생각든다.
윤선도가 지었고 증손인 윤두서가 살았던 이곳, 비록 그들은 당쟁의 희생으로 고독한 세상을 살아 갔지만, 현재도 당쟁은 계속되는 세상이다. 그러니 야비한 일본놈들은 우리나라의 인간성을 파악하여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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