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서 완도로 가는 길목의 해안 쪽으로 상당히 넓은 들이 있고 그에 인접하여 마을이 있다. 잘 생긴 정자나무가 있는 어귀를 지나면 기와집 몇 채가 있는데, 그 중앙에 이 집(윤철하 고택)이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초호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철하 고택으로 가는 길에는 마을의 방풍림 역활을 하는 팽나무 고목과 정자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하고 있다.솟을대문이 서 있는 문간채는 모두 9칸이고 마당이 넓다. 안에서 바라본 문간채문간채의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에 윤철하고택의 사랑채로, 석축 산자락에 들어선 고택은 경사를 다듬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올렸다.사랑채는 우진각지붕 7칸 일자집이다. 마당에 화단을 조성해 꽃과 나무를 심었다. 여느 사랑채마당과 달리 보인다.사랑채 앞마당에 화단을 만들고 나무와 꽃을 심어 꾸민 것이 낯설다. 조선시대에는 축대와 천장을 높이거나 궁궐에서나 쓸 수 있는 붉은 벽돌, 둥근 기둥을 함부로 쓰지 못하는 '불충(不忠)의 강박'이 지배했고 사랑채 앞마당은 빈 공간으로 놔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낯설게 보인 것이다.안채로 가는 곳은 사랑채 왼쪽으로 돌아서 골목길 같은 곳으로 돌아서 들어 가야 한다.사랑채 끝에 협문이 설치되어 있다.이 집은 여느 살림집 같지 않고 산중턱에 들어선 한적한 절집 같다. 이집 구조는 돌계단을 올라 사랑채로, 다시 더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안채로 들어가게 돼 있다. 게다가 안채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절집의 문처럼 두툼한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중문은 바로 안채 마당이 보이지 않게 입구와 출구를 다른 방향으로 꺾어 놓았다. 비밀공간처럼 밖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안채와 별당채는 신경을 많이 써서 지었다.별당채는 함부로 쓰지 못했던 원기둥을 마음껏 세워 멋을 부렸다. 특히 별당채는 팔각으로 깎은 화강암 장초석을 사용해 공 들여 만들었다. 별당채도 □자형의 평면이다. 역시 칸반통인데, 좌우로도 반 칸의 퇴가 있다. 중앙의 2칸이 대청이다. 대청 북쪽에 방 1칸이 있다. 북쪽으로 반칸퇴가 있다. 대청의 남쪽은 방이다. 이 방에 이어 서쪽으로 방 1칸이 더 있다. □자형으로 꺾인 부분이 된다. 이들 방의 남쪽으로 반칸퇴가 있다. 남쪽퇴에서 북쪽퇴에 이르기까지 앞퇴가 계속되었다.별당채 뒤에도 협문이 설치되어 있다.윤철하고택 안채는 안채와 별당채 별당채와 안채가 어우러져 ‘ㄷ’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우진각지붕인 반면 안채는 보다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ㄱ자형이다. 칸반통이었으나, 일부는 후대에 덧붙이거나 하여서 변형이 되었다. ㄱ자로 꺾인 평면 중 남쪽의 끝칸과 다음 칸이 부엌이다. 그 북쪽의 2칸이 안방이고, 그 북쪽이 마루방이다. 여기에서 꺾이면서 서쪽으로 3칸의 대청이 계속되고 이어 방 1칸인데 ‘못방’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 반 칸 퇴가 있다. 이들 앞쪽으로는 앞퇴가 있어 안방에까지 계속된다. 5량으로 가구하였다.안채 상량문에 ‘광무10년병오 11월27일 경신수주 동12월초3일을축신사시 상량축좌(光武十年丙午 十一月二十七日 庚申竪柱 同十二月初三日乙丑辛巳時 上樑丑坐)’라 되어 있다. 광무 10년은 1906년이다. 이때 안채와 함께 사랑채·별당채도 다 준성되었다고 한다. 안채담과 사랑채지붕 높은 곳에 지어진 안채라도 밖에서 잘 보이지 않고 안채마당에서도 밖이 잘 내려다보이지 않는다. 안채 담과 사랑채 골기와 골만 보인다.뒷산이 좋고 집 주변에도 좋은 나무들이 있어서 풍치가 뛰어나다.이 고택은 안채는 1906년, 행랑채는 1912년, 별당은 1914년도에 지어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집 규모와 양식의 제한이 없어진 갑오개혁(1894) 이후에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이 집은 세 영역으로 나뉜다. 문간채가 있는 사랑마당과 축대 위의 사랑채 영역, 사랑채지붕 높이의 석축 위에 앉아 있는 안채와 별당채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