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4일
남원에는 민족 역사에서 잊지 못할 장소가 한 곳 있으니 바로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정유재란(1597) 당시 의롭게 죽은 만여 명의 무덤이다. 교룡산성과 남원성의 역사의 현장을 둘러 본후, 남원시에 있는 조선후기 정유재란 당시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이 있는 만인의 총에 왔다.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冢)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맞서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 관, 민을 합장한 무덤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한다. 1981년 4월 1일에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만의의 총 정문.
만인의 총 광장에서 바라보는 전경이다. 임진왜란(1592)이 발발한 지 5년 후 다시 전쟁이 터지자 왜군은 전쟁 초기의 실패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점이라 생각하고 일단 전라도를 점령한 후 북진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남원성으로 왜군은 46,700명이 쳐들어 왔다. 조선군은 남원성 북쪽의 교룡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을 막고자 했다. 교룡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곳인데, 기병을 거느린 명나라 장수 양원이 벌판이 전쟁에 유리하다며 남원성에 진을 치게 된 것이다.
그당시 남원성에는 양원의 명나라 기병 3,000명과 조선군 1,000명, 일반백성 6,000명이 버티고 있었다. 8월 13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8월 16일에야 끝났다. 사흘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끝까지 항쟁하던 관군과 백성들은 왜군에게 모두 도륙당했다. 큰소리치던 양원은 50기의 기병을 데리고 도망쳤다. 도망친 양원은 명나라 사령관 양호에게 도주의 죄로 참수돼 남대문에 효수됐다.
만인의사 순의탑을 지나서 공터 중앙 앞쪽에 만인의총 홍살문이 나온다. 門자 모양의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한 나무문으로, 화살이나 삼지창을 닮았다.
만인의 총 기념관은 현재 운용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새롭게 공사하고 있는 기념관 건물로 이전하는가 보다.
홍살문과 외삼문 충의문, 내삼문 성인문, 그리고 성인문 안에 있는 충렬사를 거쳐야 만인의총에 이를 수 있다.
충렬사는 1612년에 처음 건립, 제향을 모셔오다 1653년 사액사당이 됐다.
충렬사에서 향을 태우고 묵념을 한후 뒤편 계단으로 올라서니 드디어 만인의총에 들어섰다.
전쟁이 끝나고 성에 들어온 백성들은 모든 유골을 수습해 하나의 봉분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만인의총은 조선 관군과 백성의 의기를 떨친 유적이다. 만인의총은 임진왜란보다 잔혹했던 정유재란 당시 민·관·군이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고 하나가 되어, 잔인무도한 왜적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 위대한 역사다.
무덤옆 8충신 사적비는 고종 9년(1872) 남원부사 이병석이 글을 짓고 세웠다. 충열사를 세운 내력과 변화를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