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1일
청풍호반케이블카를 타고 비봉산정상에서 충주호를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산들과 골짜기마다 가득 차 있는 풍광을 가슴에 담은 후 주변에 있는 여행지, 청풍문화재단지를 답사한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에 있는 마을이 수몰되기에 수몰 지역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을 해 단지를 조성했다.
청풍문화재단지를 관람하려면 입장권을 구입한 후 팔영루로 들어가야 한다. 팔영루는 조선시대에 청풍부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던 누문이다. 아래는 문이고 위에는 누각의 형태로 되어 있다.
청풍면 지곡리에 있는 옛집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곱은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 모양의 곡간채 및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문간채 주위에는 담장을 둘러 바깥마당과 구분하고, 대문간에도 담을 설치하여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고방을 두어 식료품을 저장하는데, 부엌과 고방 사이에는 판자벽을 둘렀다. 이러한 기법은 오래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특히 안채와 곡간채 사이에도 담장을 둘러 사랑채 역할을 하고 있는 건넌방의 독립성과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한 점이 특이하다.
청풍 석조여래입상 보호각.
보호각에 있는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보물)은 불상은 높이가 341cm이고,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 이란다.
조선시대 금남루는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아문으로 들어가면,
대청마루 위 의자에 앉아있는 사또와 두 이방, 그리고 형틀과 좌우로 포졸을 묘사해놓은 금병헌이 있다. 숙종 7년(1681) 청풍부사 오도일이 지은 관청인 금병헌인데, 부사가 집회와 집무를 처리하던 관아의 행정중심건물인 동헌이다.
금병헌 우측으로 응청각 끝으로 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로 건축된 청풍 한벽루(보물)가 있다.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 (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옛 도호부를 지나면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올라가는 길에 있는 육각정 `관수정`이 자태를 뽐낸다.
관수정 뒤로 아름다운 소나무 연리지가 나온다.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 하여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 쉽게 사랑나무라고도 부른다.
삼국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망월산성의 남벽에 왔다. 신라는 망월산성을 단양적성과 함께 한강변 주요 군사 요충지로 이용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문무왕 13년(673)사열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열산성은 망월산성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단다.
망월산성 남동쪽으로는 남한강 양 옆의 산자락과 둘을 이어주는 청풍대교의 절경과 금수산의 비경이 멋지게 펼쳐져 운치를 더한다.
망월산성 망월정.
정자에 올라가 비봉산을 바라본다. 자세히 보면 케이블카가 대롱대롱 메달려 있다.
망월산성에서 내려와 유물전시관 방향으로 가다보면 옛 청풍도호부 터에 전시되었던 송덕비와 선정비들 앞에는 제천 황석리 고인돌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김중명이라는 분이 맨몸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안내판이 있다.
제천 후산리 고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연자방아
`청풍 황석리 고가`이 집은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민가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황석리 고가 오른편에 보면 유물전시관과 수몰역사관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유물전시관에는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 제천의 역사를 담고 있다.
특히 조선 말기 유학자 유중교가 세운 서당인 자양서사에서 의암 유인석이 이곳에 의병 진영을 설치해, 일본군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남산전투`가 잘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