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5일
신성리갈대밭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까지는 약 8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중간에 한산면소재지가 있는 한산은 앉은뱅이 술로 유명한 소곡주의 고장으로 한때는 소곡주축제도 열렸던 곳으로 최근에는 축제를 한다는 소식이 없어 못내 아쉬운 고장이다. 한산에서 마산면으로 가는 613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종지리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월남 이상재선생 생가지 주차장 좌측으로 안내소가 나오고,
정원 안으로 들어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먼저 좌측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로 향한다.
이상재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원래 건물은 1955년 훼손돼 유실되고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됐으며,
사랑채 우측의 모습이며, 바깥으로 우물이 보인다.
사랑채 좌측으로 폭 좁은 솟을대문이 앙증맞게 반긴다.
헛간과 넓직한 마당 건너 안채가 보이며,
집 벽에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 한산면 생가지에서 '한국 독립운동사 사진전'을 열리고 있었다. 구한말 의병 항쟁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역사의 흐름과 발자취를 담은 20점의 사진을 볼 수 있다.
헛간과 안채사이 뒤로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이 없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가 특징으로,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생가는 전면 지붕의 길이가 뒷면보다 길게 만들어졌다.
선생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 유아시절부터 청년시절을 보냈다. 15세 때 강릉유씨와 결혼해 신혼을 보냈으며, 18세 때 선생이 집을 떠난 후에도 부인 강릉유씨는 이곳에서 승륜, 승인, 승간, 승준 등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이상재 선생을 뒷바라지 한 곳이다.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1955년에 훼손돼 유실 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원래 초가집의 사진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적 132점, 임명장 6점 등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셨던 총 244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좌상
독립협회, YMCA, 조선교육협회, 신간회 활동 등 선생의 일대기를 각종 자료와 함께 알기 쉽게 정리해 둔 유물전시실이다.
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에 살던 선공감가감역을 지낸 이희택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전형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장남 이종덕의 15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다가 5대조 이익태는 한성부좌윤, 고조부 이덕한이 사마를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다시 아버지 이희택이 선공감의 가감역으로 출사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이자 자는 계호이고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상재로 바꾸었으며 아호를 월남이라 하였다.
이상재는 1867년 과거에 낙방하고, 서울에서 사귄 박정양이 1881년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학무아문참의를 지냈고, 그 뒤 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 등을 지냈다. 1896년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고, 1898년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3년 동안 복역하였으며, 1923년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었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3월 29일 병으로 죽었다. 장례식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재 선생의 애국심과 민족 사랑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 된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