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2일
붓뚜껑과 목화씨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분.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와 의생활과 섬유문화의 발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 문익점"선생의 사적지를 찾아 봅니다. 사적지에는 문익점신도비, 도천서원, 신안사재, 묘소등이 있습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익점로 34-32 외 4필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익점사적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사적지 표지석 앞에 문익점 신도비각 과, 우측으로 문익점선생의 장남 시성숙공 부부 신단비 가 있으며, 문익점 신도비 는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문익점(1329~1398)은 공민왕 12년(1363)에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사람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였다가 최영에게 패한 일이 생겨, 문익점도 그 누명을 쓰고 귀국과 동시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귀국할 때 붓뚜껑 속에 목화 몇 송이를 숨겨와 정천익(장인)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전국에 퍼지게 하였다. 비는 조선 순조 34년(1834)에 세운 것으로, 강화도에서 돌을 캐어 등짐으로 3년여를 옮긴 후 마을의 도로변에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문익점신도비에서 약 500미터를 걸어 들어가면 도천서원 홍살문 뒤로 문익전 선생의 동상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충정공 문숙선의 아들인 삼우당 문익점(1329~1398)선생은 공민왕 9년(139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도천서원과 신안사재의 전경.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의 연고지로,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을 세웠다.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으며,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충선공 선조묘소 봉심기념비.
도천서원 묘정비와 도천서원 전경, 도천서원 정문 양덕문은 굳게 잠겨져 있어 직접 관람을 하지 못하고 담장밖에서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도천서원 정문 양덕문 안으로 도천서원 강당 시경당이 보인다. 1401년(태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문익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도천서원의 동재
신안사재 와 추원문이 있는 문간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와 서원 건축형식의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신안사재는 문익점의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1551년(명종 6)에 창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04년(순조 4)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건물 앞쪽에 마루를 두고 개방하였으며, 정면 좌우측에 각 1칸 크기의 마루를 두었다.
사당인 삼우사
문인점 선생 묘소로 가는 임도길은 은근히 오르막이다.
직감적으로 상당히 공들인 묘소로 문익점 선생의 묘다.
산청 삼우당 문익점 묘소 는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사각형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앞에는 상석과 비석이,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석등이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묘소는 비교적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좋은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