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 동복면 822번 지방도로인 일명 김삿갓로를 따라 사평면방향으로 가다 보면 구암마을 입구가 나오는데, 구암마을에 김삿갓 종명지 가 있다. 김병연이 본명인 김삿갓은 서러운 나그네로서 하늘을 삿갓으로 가린 채 다녔다고 해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삿갓은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하고 어떤 연고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구암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옆에 김삿갓종명유적지의 표지석도 보인다. 표지석 뒤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종명지까지 약 1km를 더 들어가야 종명지가 나온다.구암마을 입구 반대방향에는 숲이 아름다운 연둔리숲정이 마을이 있다. 숲정이는 ‘마을 근처 숲’을 일컫는 우리 말이다. 전에 없던 구름다리 도 만들어 놓았다.느티나무를 앞세운 거목 200여 그루로 가득한 숲정이는 둔동마을 앞의 동복천을 끼고 1km를 이어진다. 연둔 숲정이의 숲이 각별한 건 마을 사람들과 기나긴 시간을 함께해왔기 때문이다. 마을 앞에는 1600년경에 둔동보가 조성되면서 마을을 보호하고자 인공으로 만든 숲이다.빽빽이 들어선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로 풍성함이 더하여 이제는 관광 명소 가 되였다. 왕버들, 느티나무, 서어나무, 검팽나무 등 200여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숲을 형성하고 있다.노거수들이 개천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천변을 따라 숲속을 산책하다보면 마치 터널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밑동이 굵은 왕버들을 보며는 세월의 흔적이 깊다. 하천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 숲에서는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온 마을의 지혜와 온기가 느껴진다. 하천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보고, 벤치에 앉아 흐르는 강물과 숲정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푸근해진다.연정이숲을 돌아본 후 방랑시인 김삿갓 종명지 가 있는 구암마을로 향한다. 걸어서 가도 되지만 마을에 제법 큰 주차장이 있다.삿갓동산에는 시인이 전국 각지를 유람했던 모습을 담은 동상과 시비가 조성되어 있다. 김병연의 본관은 안동.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이다.김삿갓은 구암마을 창원 정씨 사랑채에 머물며 마을 건너편 망미대와 동복 관아의 협선루에서 시상을 얻어 풍류 시 작품을 남겼다.풍자와 해학으로만 알려진 그의 시는 관조적 허무와 애절함이 묻어나는 시다. 김삿갓의 작품에는 동복과 관련된 시도 있다. 그는 1841년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 적벽 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구나'라는 시구를 남겼다.`김삿갓동산 한쪽에는 `의사 귀헌 강극경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는 내용이다.삿갓동산은 동복오씨 세장산으로 대대로 묘를 쓰고 조상을 매장하는 산 이란다.구암 1구마을에 ‘김삿갓 종명지’가 있다. 종명지는 글자 그대로 ‘목숨을 다한 땅’이니, 그가 죽은 자리를 말한다.전국을 방랑하던 김삿갓은 화순의 경관에 반해 세 번이나 찾아와서 머물렀다. 첫 번째 화순 방문에서 적벽을 보고 한눈에 반한 그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화순을 다시 찾아와 압해 정씨 집안에서 내어준 방에서 기거했다.동복면 구암리 647번지 김삿갓이 머물렀던 곳에 안채와 사랑채, 사당등을 복원하여 놓았다.세간에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은 고향이 경기도 양주였다.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죄로 집안이 멸족돼 강원도 영월 땅에 숨어 살았다. 살다가 영월 백일장에 '김익순의 죄를 논함'을 글제로 일등을 했는데 알고 보니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였다. 역적 가문이요 조상을 능멸한 죄책감에 김병연은 팔도를 방랑했다. 세상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렸다. 김병연은 1841년과 1850년, 1857년 이렇게 세 번 화순을 찾았다. 마지막 6년 살던 동복면 구암마을에 둘째 아들 익균이 찾아와 고향으로 모셔갈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김병연은 1863년 3월 29일 57세 나이로 구암마을 선비 정치업의 사랑채에서 죽었다. 정치업은 김병연 시신을 거둬 마을 뒷산 무연고 묘지에 초장을 치러줬다. 묘지는 동산 혹은 천한 놈들 묻었다고 똥묏등이라고 불렀다. 3년 뒤 익균이 찾아와 아비 시신을 거둬 영월에 묻었다.안채마당 한끝에는 김삿갓을 추종하던 이고장 사람이 만들은 김삿갓좌상이 있다. 안내판에는 화순 이서 적벽의 비경에 매료되어 동복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시를 남기고 동복에서 마지막생을 거둔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을 조각함이라고 적어 놓았다.마을 뒷산 김삿갓초분지를 찾아 가 본다.한 많은 생을 마감한 구암리 마을 뒷산 초장지를 향하는 길. 그분이 돌아가실 때 와는 모습이 다르지만 그시절 좁다란 구불길이 연상된다.선생이 묻혔던 구암리 마을 뒷산을 동뫼등이라 한다.김삿갓초분지 옛날 길손들이나 주인없는 시신을 묻었다하여 똥뫼라고 불렸던 곳이다. 김병연은 1857년 정치업 선비의 집 앞에서 쓰러져 반년여동안 머물다가 다시 지리산 등지로 떠났으며, 3년만에 정 선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1863년(철종14년) 3월29일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다. 동복 구암리 마을 뒷산에 묻혔던 고인은 3년 후 가족들에 의해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마대산으로 이장됐다. 지금은 파묘의 흔적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