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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행

연곡사

2024년 5월 17일

전남 구례에서 경남 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에서 전남과 경남의 도 경계가 다다를쯤, 좌측편 산자락으로 깊은 계곡이 이어진다. 피아골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는 연곡사를 지나 직전마을까지 연결된다. 해발 고도가 높지 않음에도 주변 산세가 가팔라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깊은 산중이다.  피아골은 ‘피밭골’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도로 끝 직전마을은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피를 심어 굶주림을 면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그럼에도 어감에서 ‘핏빛’이 연상되어 피아골의 붉은색 단풍이 핏빛으로 생각하게 한다. 가을에 단풍과 함께 이곳 연곡사에 국보와 보물을 답사하면 좋으련만 오늘은 연곡사의 내력과 국보들을 답사하겠습니다.

 

 

 

 

19번국도에서 갈라져 연곡사일주문까지 약 7.7km의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오면, 일주문 앞에 서너대의 주차공간이 있다. 직전마을은 이곳에서 1.6km더 들어 가야 한다.
연곡사는 545년(신라 진평왕 6) 연기조사가 창건했으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절의 이름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큰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법당을 세운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구한말 때는 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다시 불태워진, 일본과는 매우 악연이 깊은 절이라 했다.
사천왕문에는 인상적인 사천왕상이 있다. 부리부리한 눈매로 사천왕은 잡귀가 오는지 내려다 보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누각이 나오는데, 누각에 걸린 현판이 ‘삼홍루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지리산을 열두 번이나 올랐다는 남명 조식이 남긴 시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가을 단풍의 절정에 피아골을 찾은 남명은 시 한 수를 남겼다.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가을의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천공이 나를 향해 뫼 빛을 꾸미시니/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삼흥루 누각으로 들어가기전 좌측으로 '피아골순국위령비'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정유재란(1597) 때는 수많은 백성과 승군이 왜군에 맞서 계곡이 핏물을 이룰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고, 구한말에는 수백 명의 의병이 끝까지 무장투쟁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했던 곳이다.
연곡사의 봄 하늘은 가을 하늘같이 티끌하나 없이 맑고 푸르렀다. 절 경내는 스님의 독경소리만 그득할 뿐 고즈넉했지만, 임란때 나라를 위해 창과 칼을 든 스님들과 민초들,
6·25전쟁 때는 군인과 민간인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다 무수히 죽어간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난리통에 절간이 온전할 리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라는 자랑에도 불구하고, 연곡사의 전각은 모두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석조물은 그대로 남아 천년 고찰을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 종각과 요사체
앞면 5칸, 옆면 3칸의 연곡사 대적광전
명부전
연곡사 대적광전 뒤쪽에는 국보와 보물을 둘러보는 ‘연곡사 국보순례길’이 있다. 순례라고 하지만 600m 남짓의 짧은 산책로다.
순례길은 동승탑에서부터 시작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데, 국보로 지정된 동승탑과 북승탑, 보물로 지정된 소요대사탑, 삼층석탑, 현각선사비를 보게되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연곡사 동 승탑과 동 승탑비 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동 승탑  남북국시대(통일신라) 탑을 대표하는 승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동 승탑(국보 제 53호)이다. 탑비가 사라져서 탑의 주인공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도선국사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다.이 탑은 일제강점기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은 팔각으로 구름속의 용과 사자상 등이 새겨져 있다.
연곡사 동 승탑비(보물, 1963년 지정)가 남아 있으나 비신이 남아 있지 않다. 전해오는 말로는 도선국사(827∼898)의 탑이라고 하나 이를 입증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연곡사 북승탑(국보제 54호), 이 탑 역시 누구의 승탑인지 모른다. 옆에 있어야할 탑 주인공의 비석인 탑비가 사라져버려 안타깝게도 탑의 주인공과 만든 연대를 모른다. 다만 동쪽에 있는 동승탑과 만든 연대(남북국지대)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며 이름 또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승탑'으로 부른다.
탑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상륜의 일부는 도굴꾼의 소행으로 회손되었지만 보수를 하였다.
이쁘게 담장을 만든 연곡사 부도군이다. 이안에 소요대사탑이 있다.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은 보물 제154호이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석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과 '순치6년경인'(順治六年庚寅)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소요대사가 죽은 다음해인 1650년(효종 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례 사람들이 1958년 연곡사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숲 아래에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는 순절비를 세웠다.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전사한 그의 아들 고인후의 12대 조손이 의병장 고광순이다. 그는 구한말 1907년 연곡사 일대를 근거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의병장 고광순 그는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연곡사에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순경들을 보내 공격하였고 1907년 10월 16일 화승총으로 맞서던 고광순과 의병들은 일본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연곡사는 불태워졌다. 우리의 속담에 "콩 심은 데 콩이 나듯, 의병 집안에 의병이 난다"라는 말처럼 대를 이어 나라에 충성을 바친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현각선사탑비 보물 제152호  연곡사에는 소요대사탑 말고도 고승들의 탑비가 여럿 있다. 사진은 현각선사탑비인데 애석하게도 탑의 몸체가 사라지고 머리부분만 바닥에 주저 앉아 있다.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2호,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3층 불탑.
슬픈 역사를 지닌 이곳 연곡사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탑 3기가 있으니, 동승탑, 북승탑, 그리고 소요대사탑이다. 일본의 만행에도 석물들이 일부가 훼손은 됐을지언정 그런대로 살아남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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