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운조루 고택은 1776년 류의주 선생이 지은 조선시대 양반 가옥이다. 지리산 형제봉 남쪽으로 뻗은 끝부분에 자리잡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에 위치하고 있는 고택을 답사하겠습니다.
지리산 남쪽 구례 오미리에는 자리잡은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운조루는 금구몰니(金龜沒泥:금거북이 진흙에 묻힌 자리)의 명당으로 집 앞에 훤히 펼쳐져 있는 너른 들판, 병풍처럼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뒷산, 대문 바로 앞을 힘차게 흘러 지나가는 작은 시냇물 등 명당으로써 이의를 달수 없는 길지다.운조루 긴 행랑채 앞으로 연못도 길게 조성되어 있다.대문을 중심으로 동.서행랑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규모가 엄청나다. 현재는 동쪽 11칸, 서쪽 7칸이다.운조루 하면 떠올리는 대문 앞 뒤주는 탐방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놓아둔 것으로 대대로 내려온 '타인능해 뒤주'는 '운조루 유물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는 '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뒤주안에 있는 곡식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운조루 대문 위에 걸린 짐승의 뼈도 있다. 류이주가 산을 넘다 만난 호랑이를 때려잡고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호랑이뼈를 걸어놨지만 도둑을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는 대청 서쪽으로 누마루가 돌출되고 뒤로 마루방과 온돌방이 이어져 T자형을 이룬다. 사랑채의 가구는 3량구조다.안마당은 사랑채의 부엌을 겸한 중문간으로 진입한다.중문 좌측으로 큰사랑채사랑채 봉당 우측으로 안마당으로 들어 가면,사랑채와 연결된 ㅁ자형의 안채와 부속건물이 나타난다. 안채는 각각 전면 2칸의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부엌과 건넌방으로 구성된 몸채를 중앙에 둔 ㄷ자 집인데 앞의 안 행랑채 · 중간 사랑채와 함께 안마당을 에워싸고 있다.안채 좌측으로 방금들어왔던 중문으로 사랑채와 연결된 부엌의 모습이다.운조루에는 크기가 다양한 물확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집 지을 때 돌거북이 나왔다는 안채부엌의 모습.옛날 부엌에서 사용하던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안채 우측의 다락방과 부엌, 곳간채.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인들이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든 다락이다. 다락에 오르면 오미마을이 마주하고 있는 오봉산이 정면으로 내다보인단다.다락방부엌을 통해 밖으로 나가 보겠습니다.좌측으로 안채 뒤뜰로 나가는 통로가 보이고,부엌에서 나오면 우측으로 동문과 사당으로 가는 통로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중문앞 정원이 나옵니다.좌측이 측간으로 가는 중문. 우측이 작은사랑채로 나가는 중문이다.운조루 사당중문 밖 측간과 넓은 뜰.안채 뒤뜰의 모습.안채 좌측 부엌에서 나오면 우물이 나오고, 우물을 돌아서 사랑채로 가는 중문이 나옵니다.우물 옆 중문에서 나오면 사랑채와 연결된 통로.사랑채와 연결된 곳간채.사랑채와 좌측의 밖을로 나가는 중문이 보인다. 원래는 중문 밖에 별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운조루'라는 당호 역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왔다. 관직을 집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의 기쁨을 생생하게 그린 시다. `귀거래사`에서 당호가 등장하는 부분을 옮긴다. 시구의 첫 자를 합한 것이 이 집의 당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 나오고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운조루 행랑채와 이어진 서쪽 담장의 전경이다.운조루를 답사한후 100여m떨어진 운조루 유물전시관에 왔습니다. 운조루를 답사하실때 이곳 주차장에 주차후 답사를 권합니다.운조루의 솟을삼문에 있던 뒤주를 유물관에 옮겨온것이다. 높이 약 1m, 지름 약 50cm 크기의 원통형 나무 뒤주다. 뒤주는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이다. 뒤주 앞면 아랫부분 마개에는 '타인능해'라는 한자가 쓰여 있다. 뒷면에는 '아무쪼록 굶주린 이가 없도록 하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운조루 유물전시관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100년 동안 쓴 생활일기부터 운조루 현판, 생활민속품 등 운조루의 삶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조선후기의 서예가 이익회의 글씨 운조루 현판과 청주상당산성도.‘전라구례오미동가도’. 진본을 도둑 맞아 복사본만 남았다. 운조루는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1776년에 지었다. 7년 남짓 걸린 큰 공사였다. 류이주는 남한산성 보수와 함흥성 축조 등 대규모 건축에 참여한 관료 출신이었다. 1800년대에 그려진 '전라구례오미동가도`를 통해 운조루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운조루의 5대 주인 류제양(1846~1922)의 영정 과 시언(1851~1922년 까지 쓴 친필일기).오래된 집, 고택은 그렇게 묵묵히 찾아올 이들을 기다리고, 반긴다. 게다가 저마다 숨은 이야기도 품고 있다. 운조루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한 눈에 살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