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5일
유민산이 뒤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휴식공간 그밖에 장서 보관 기타시설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구조를 잘 갖추고 있어, 2019년 7월 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우리나라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 서원 중 47개소만 남게 되었는데 그 중 미훼철 서원이며, 일제강점기나 6.25사변 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이다.
필암서원 전면에 위치한 전통정원과 주변 녹지는 방문객들이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하여 문화재와 조화롭게 구성하였다. 부용지와 삼연정의 모습이다.
장성 필암서원 홍살문과 하마석. 필암서원 은 조선시대 성리학 의 대가로 호남 에서 유일하게 문묘 에 종사된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 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90년 (선조 23) 그의 문인 변성온·기효간·변이중등 호남 선비들이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하였다.
서원의 정문으로 사용하는 확연루(廓然樓). 위층은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아래로는 출입하는 누문 형식의 외삼문이다. 현판 확연루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넓게 탁 트이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청절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이는 본래의 진원현 객사를 1672년에 옮겨 온 것이다.
확연루와 강당인 청절당 사이의 뜰은 필암서원의 유식 공간이다.
유식공간에서 강학공간으로는 청절당 좌측으로 들어 간다.
철정당 좌측 담장넘어에는 고직사가 자리한다. 이곳은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직사・창고・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강학공간으로 강당 뒤쪽 좌우 대칭되는 곳에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재·서재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동재 숭의재, 우측의 경장각에는 조선 제12대 임금 인종이 세자 시절 김인후에게 하사한 어제목죽과 묵죽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서재 진덕재와 강당인 철정당의 모습니다.
`필암서원계생비`는 송재 송일중이 썼다. 이 비는 `묘정비`도 겸하고 있는데, 뒷면에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 뒤쪽으로 사당으로 통하는 내삼문으로 제항공간의 정문이다.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제향 공간인 `우동사(祐東祠)`가 있다. 이곳에는 하서 김인후 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우동(祐東)`의 의미는 송시열의 `신도비명`에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선생을 종생하게 하였다` 의 뜻이다.
장판각에는 `하서집`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1975년 보물로 지정된 노비보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 옆 건물은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다.
내삼문 좌측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필암서원은 비교적 옛 모습대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원진각은 유물 전시관으로 양영재단과 하서학술재단에서 기증한 하서 선생 유물 29종 3천 7백여 점 가운데 국가지정 보물 제587호 노비보 와 봉심록, 상징필, 현판, 앞다지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물은 하서 선생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원진각(元眞閣)`이라 명칭 한 것은 정조대왕이 감탄했다는 하서 선생의 시 `중니원기자양진`(仲尼元氣紫陽眞)이라는 시구의 ‘원(元)’자와 ‘진(眞)’를 이용하여 명명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상징필`을 볼수 있다.
`원장선생안` 보물 제 587-2호 송준길, 유척기,등 필암서원 역대 원장 9명의 자, 생년, 본관, 관함, 호, 시호를 기록한 문서.
`필암서원원적` 보물 제 587-8, 9 ,10호 서원에 적을 둔 유생들의 명부. 필암서원소유 자산 관계 기록.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16세기 호남 성리학의 초석을 놓았던 하서 김인후. 1510년(중종 5년) 전라도 장성현 맥동에서 태어났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 시를 잘 짓고 문장이 뛰어났다. 22살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금의 서울대학교 격인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안동에서 올라온 퇴계 이황과 함께 공부했고 훗날, 이황과 '사칠논변'을 벌였던 기대승, 노수신 등과 사귀었다. 31살 되던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96년(정조20년) 9월17일에 하서 김인후에게 내린 추증교지다. 이조판서에서 영의정으로 품계를 올려서 내려준 것이다.
양자징은 하서의 절친이며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자 하서의 사위다.
조선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경상북도 안동의 '도산서원'이 영남 학맥의 중심이라면,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은 호남 유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안동에 도산서원이 있다면 장성에는 필암서원이 있고, 필암서원에는 하서 김인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