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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월영교

2024년 5월 29일

안동댐 밑으로 조성된 월영공원 부근에 목책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책교 가 `월영교`다. 월영교의 이름은 안동댐을 가로지르며 안동시 상아동과 성곡동을 연결하는 '월영교(月映橋)'는 댐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옮겨온 인연과 음달골이라는 지명을 참고로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명명됐으며 2003년 첫 선을 보였다.

 

 

 

 

월영공원에 있는 표지석입니다. 아침이면 물안개로 뒤덮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밤이면 조명과 달빛으로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하는 월영교는 이름 그대로 달이 비치는 야경이 아름답지만 조선시대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숭고한 사랑을 기리는 상징물이랍니다.
월영교는 안동하부댐내 월영공원과 안동민속촌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행정구역 상 상아동과 성곡동을 연결합니다. 길이는 총 387m, 너비 3.6m로 차량 진입은 불가능합니다.
월영교 상부 방향으로 안동댐이 보입니다.
월영교 하부에도 작은댐을 만들어 항시 수위가 일정하게 하여 주변을 공원화 하였습니다.
월령교 중간에 월영정으로 항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입니다. 420년간 무덤 속에 있다가 최근에 알려진 '원이엄마 편지'에는 병든 남편을 위해 부인(원이엄마)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줄기로 신발(미투리)을 삼아 구완하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끝내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정이 구구절절 담겨 있다. 이에 월영교의 다리 곳곳에는 이 부부의 사랑을 상징하는 미투리 형상이 새겨져 있다.
월영정를 중심으로 호수를 가로지르는 목책교, 거울처럼 맑은 호수와 병풍같이 둘러친 산, 호반 둘레길을 잇는 조화로운 야간경관조명이 만들어내는 낭만적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월영교를 건너자 흙길이 나타난다. 월영교를 찾은 연인들이 원이엄마 테마길에서 사랑의 자물쇠 격인 상사병을 걸어두고 사랑을 맹세하는 곳이다.
편지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하려고 부인(원이엄마)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줄기로 신발(미투리)을 삼는 등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31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정을 표현하고 있다.
석빙고로 향하는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다소 가파르게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니 석빙고 봉분이 나온다.
안동 석빙고(보물 제305호)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왕에게 진상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13년(1737년)에 이매신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3년간 재임하던 중 녹봉을 털어 석빙고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2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몰리자 1976년 도산면 서부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이다.
직사각형의 큰돌로 만들어진 석빙고 내부의 모습.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혀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막아 놓은 듯하다. 다만 내부에 거울을 두어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곳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직접 보지 못하고 거울을 통해 봐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석빙고를 지나 몇 걸음 더 가면 '선성현 객사'가 보이는데,
객사 입구 왼쪽에는 '월영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호)라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월영대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원래는 월영대라 적혀있는 바위 바로 위에 '금하재'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하재는 이곳으로 옮겨지지는 못한 듯 '월영대'라 적혀 있는 바위만 이곳에 남아 있다.
선성현 객사는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예안현감 김성유가 고쳐 지은 건물로, 조선시대 객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객사 중앙에 위치한 '정당'에서는 초하루와 보름에 전패를 모시고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정당의 양쪽은 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장소였다. 선성현 객사도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도산면 서부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선성현 객사를 지나면 초가토담집, 초가도토마리집 등 많은 민속문화재가 안동댐의 건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한마당에 두채의 집이 있는데, 우측에 있는 집이 곳간으로 보이는데 완전히 다른 집이다.
`안동 사월동 초가토담집` 이 집은 원래 안동시 월곡면 사월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초가토담집으로 정면에만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 3면은 모두 두꺼운 토담벽으로 벽체를 구성하였다. 토담은 판축방식(거푸집 속으로 이긴 흙을 다져 넣어 말리는 방식)으로 다졌다. 이같은 판축토담집은 우리 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던 가장 서민주택의 형태이며, 두꺼운 토벽과 초가지붕은 추위와 더위를 효율적으로 방지하여 쾌적한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안동 의촌동 초가도토마리집` 도토마리란 베틀의 한 부분으로 실을 감아둘 때 사용하는 H형의 널빤지를 말한다. 도토마리집은 부엌이 가운데 있고 양옆에 방이 있는 평면 구조가 마치 도토마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채의 초가집에서 200여m 떨어진 북쪽방향에 `박은숙 초가``박원숙 초가를 관람한다. 박은숙 가옥은 안동시 와룡면 가류동에서 옮겨 온 농가로 본채와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별채는 헛간과 외양간이다.
`박원숙 초가겹집`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농가로 안동시 와룡면 가류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옮겨 왔다. 본채와 대문채, 고방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채를 중심으로 두 채가 ‘ㄷ’ 자로 배치되어 있다. 온돌 중심형 겹집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외양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사랑방으로 변하고, 뒤쪽 안방이 확장된 점이 특징이다.
`남반고택`은 조선 고종 때 홍문관 교리를 지낸 남반 이만형(1825~1877)의 옛집으로 택호는 교리댁이다. 원래 진성 이씨 집성촌인 예안면 의인마을(현재의 도산면 의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옮겨 왔다. 북향집으로 정침과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전방에 사랑채가 돌출되어 있으며,
그 뒤에 ㅁ자형에 가까운 안채가 이어져 있다.
안동댐을 조성하면서 수몰된 지역의 가옥 몇 채를 옮겨와 야외박물관으로 만든 민속 경관지를 둘러 보고 있다.
월영교를 중심으로 안동 민속촌과 안동 민속박물관, 이육사 시비,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장, 안동호 등이 몰려 있어, 제대로 돌아보자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더운 날씨에 이정도로 돌아보고 월영공원으로 돌아간다.
민속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육사 이원록 선생(1904.4.4.~1944.1.16.)을 알리는 `육사 시비`가 있다. 중국에서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좌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때 수인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로 택했다고 전한다.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청포도, 광야 등 서정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의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안동민속촌의 야외박물관입구 두 개의 장승을 지나서,
아기자기하게 꾸민 시소 뒤로 가마가 보인다.
`기와가마`는 1998년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변 택지개발 공사 때 발견되어 11기의 기와가마 가운데 4호 가마를 2000년 현 위치로 옮겼다. 오름식 가마이며, 둥근 돔 형태의 가마 지붕은 가라앉아 구멍이 생겼다. 아궁이는 판석으로 만들었고, 굴뚝은 소성실 끝부분에서 수직으로 파 올렸는데 지상 부분은 무너지고 없다. 출토된 기와로 미뤄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에 걸쳐 안동 일대 관청이나 사찰 등에서 사용되는 기와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변 산책로에 월영교를 기리기 위해 자연석으로 노래 '월영교'(김병걸 작사, 김인철 작곡, 권승 노래)의 가사가 음각돼 있다.
월영교 주변으로 호반나들이길, 원이엄마 테마길등 민속촌을 관람하면서 산책과 휴식처로 사랑받는 곳이다. 또한 월영교와 호반 둘레길을 연결하는 구간에는 야간조명이 설치돼 밤이면 조명과 달빛으로 또 다른 매력을 지닌 곳으로 야간에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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