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빡빡머리에 청춘의 한 순간을 보낸 곳, 따불백을 둘러매고 배출대대에서 걸어나와 열차에 탑승하던 연무역에서 얼마 안떨어진곳에 왕릉이 있습니다. 견훤묘 또는 견훤왕릉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 18-3에 위치하며,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화장실을 겸비한 왕릉급 주차장입니다.
견훤은 867년 상주 가은현(지금은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고 했으니, 신라 말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 가운데 세력이 약한 중소호족이었다. 견훤이 젖먹이일 때 부모가 일하느라 수풀 속에 혼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전설이 있다. 장성해서는 체구가 컸고, 그에 어울리게 군인이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신라 진성여왕 치세로 전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농민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창끝을 돌려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했다고 하는데, 거기서 자신감을 얻어 무진주(광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고, 효공왕 4년(900) 완산주(전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됐다.
견훤은 장남 신검 대신 이복인 넷째 금강을 후계자로 삼자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이 됐다. 견훤은 3개월 만에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황복했다. 왕건은 견훤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신검을 공격하여 신검은 크게 패한 뒤 왕건에게 항복을 한다.
견훤은 인근 황산벌에서 후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후 사망하였는데, 후백제를 일으킨 완산주(전주)가 그리워 완산주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돌계단을 따라 100여m올라오니 평지가 나타난다.
야산상부 평지에 견훤왕릉이 쓸쓸히 자리하고 있다. 낮은 철제 펜스 안으로 큼지막한 봉분이 있고, 비석이 후백제 왕 견훤 능이라고 말해줄 뿐이다.
후백제 1대 왕 견훤의 왕릉이다. 이 무덤은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으로 왕릉의 위엄에 걸맞은 비교적 큰 봉분이다.
묘 앞에는 1970년 견씨(甄氏) 문중에서 건립한 묘비가 있으며,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개태사 주변)란 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 왕릉 남쪽으로 멀리 전주방향의 산이 아스라히 보이긴 보인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 `태조왕건`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견훤이 재조명 받자 이 무덤 역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드라마 중 견훤이 최후를 맞는 장면에서는 이곳도 촬영하여 자료화면으로 방영하였다.
왕릉 주변은 상당히 넓은 공터로 차량을 이용하여 올 수 있는 임도길도 보인다.
차박 터로 딱 좋게 수돗가도 만들어 놓았다. 혹여나 이글을 보시고 무작정 차박하러 오시지 마셔요! 임도길 통행여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견훤왕은 후백제를 세웠던 임금으로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한 세력과 영토를 통치하던 제왕이었으나 비운의 역사 속에 고려 국 태조 왕건에 몸을 의탁해 보내다가 삼국전쟁 고혼들을 위로하고 화합하기 위해 세워진 황산불사에서 일생을 참회하며 보내다가 임종해 지금의 왕릉이 있는 연무대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 년 전 영웅은 가고 없고 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니 세상사 얼마나 허무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