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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부여 성흥산 사랑나무

2024년 7월 6일

 몇 년 전 임천우체국 옆 공영주차장을 기점으로 대조사, 기림성, 성흥산사랑나무, 성흥산정상등 등산로를 따라 한 바퀴 돌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차량이 성흥산사랑나무 입구까지 가는 줄 몰랐는데 성흥산사랑나무 입구에 주차장이 있는걸 보았다. 오늘은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매점 앞 주차장으로 진입한다.

 

 

 

성흥산 중턱까지는 좁은 아스팔트 도로가 만들어져 있어 차로 오를 수 있다. 성곽 남문 밑에 주차장과 매점·화장실이 있으며, 주차장에서 남문터 사랑나무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2005년 9월 백제 30대 무왕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성흥산 사랑나무는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작품에 등장했다.
주차장에서 성흥산성으로 가는 길에 700년 사직의 백제가 멸망할 당시 임천 성흥산성에서 나당연합군에 대항해 목숨을 바친 백제 무명장졸들의 충혼을 기리는 충혼사입니다.
매년 4월 충혼사에서 충혼제를 열어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답니다.
충혼사를 뒤로 하고 산성으로 가기전 요새 같은 바위지역이 나옵니다. 성문에 도달 하기전 부터 방어적인 자연 암반지역이 있으니 산성으로써는 최고의 방어를 할수 있겠지요.
부여 가림성의 안내도 입니다.
백제 동성왕 때 쌓았다는 가림성 남문지를 바라봅니다. 당당하게 보이는 느티나무가 사랑나무입니다.
성으로 들어 가기전 구멍바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봅니다. 사방이 막힘 없이 확트인 전경이 마음속의 답답함을 떨쳐버리게 합니다.
천천히 돌계단을 따라 가림성에 올라서면 사랑나무 아래 야트막한 능선과 금강줄기, 성냥갑 같은 집 등 절경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어 이곳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구경하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사비도성을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에 쌓은 성으로 삼국사기에 이 가림성을 동성왕 23(501)년에 축조했다는 명확한 연대를 적고 있어 백제 산성 중에서 옛 지명과 축성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다. 성흥산 8부 능선에 설치된 테뫼식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당연합군은 663년 백제부흥군과의 최후의 일전으로 승리로 거뒀지만 이 가림성만큼은 공격하지 못했다. 가림성은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고(660년) 부흥군 지도자인 풍왕이 백강 전투에서 패한 뒤 고구려로 망명한(663년) 뒤에도 함락되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672년까지도 신라가 가림성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높이 20m, 둘레 5m의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인 성흥산 사랑나무는 부여군 향토유적 88호이자, 2012년 부여군이 새롭게 지정한 부여 10경 중 하나다.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긴다. 2021년(8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사랑나무'라는 이름은 언제 붙여졌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서동요 방영 이후 서동과 선화공주가 사랑을 나눴다 하여, 사랑을 주제로 한 내용의 드라마들이 촬영되어 새로운 인기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입소문을 통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장소가 됐다.
나무를 보는 방향에 따라 가지의 모양이 하트 모양을 닮았다.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랑나무는 포토존에서 볼 때 오른쪽 가지가 반쪽의 하트모양을 그리고 있다.
본래 반쪽짜리 하트였던 것을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두 장 찍어서 한 장을 좌우로 편집해서 완전한 하트를 만든다는 것이다.(사진 작가의 작품)

 

철갑을 두른 휘어진 소나무의 자태를 보며 성흥산 정상으로 향한다.
사랑나무를 뒤로하고 성흥산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보인다.
유금필장군은 황해도 평주사람으로 923년에 마군장군이 되어 골암진에 침입한 북번을 평정하였으며, 그 뒤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백제 섬멸 뒤 남방을 다스릴 때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다가 임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곳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이 때 군량을 나누어 주고 둔전을 운영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푸니 임천 백성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다. 941년 장군이 죽자 고려 태조가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뒤 성종이 '태사유공지묘'라는 어필 현관을 내렸다.
사당 우측으로 돌담 내부에 `임천 유태사 묘`가 있다.
유금필 장군 사당 위로 성흥루가 보인다.
성흥산 정상부의 모습이다. 기림성의 건물터로 넓은 분지를 이룬다.
살아가면서 사람보다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에게서 위안을 얻을 때가 있다. 모질고도 찬란한 세월을 함께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을 주는 나무들이다.
사랑나무부근에서 시원한 바람이 모자를 날려버릴 것 같이 불어 주었다. 세상사에 찌든 가슴 속 응어리가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성흥산 중턱에 위치한 황금새 전설을 간직한 대조사와 천연 암석을 이용해 만든 높이 10m의 석불로 논산 관촉사의 석불과 그 규모에 있어 쌍벽을 이루는 미륵보살 입상을 둘러보기로 한다.
성흥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백제 때 고찰 대조사다. 6세기 초에 창건된 절로, 건물들은 대개 최근에 지은 것들이지만 대웅전 뒷로 고려 때 만들어진 대형 미륵석불(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대웅전 앞 삼층석탑이 옛 절의 면모를 보여준다.
한 노승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바위 위에 커다란 새가 앉는 것을 보고 깨어나 보니, 바위가 미륵불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대조사(大鳥寺)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단다.
용화보전 뒤에 자리한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성흥산 대조사를 대변한다.
용화보전 창문 넘어로 꿈속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큰 바위를 향해 날개 짓을 했다고 한 그 바위를 깎아 만든 부처상에 가까이 가보겠습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0m나 되는 거대한 석불로, 논산 관촉사 미륵불과 쌍벽을 이루는 고려시대 작품(12세기 추정)이다. 4등신에 가까운 몸집으로, 균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후덕하고 인자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미륵보살은 미래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석불 앞에는 역시 돌을 다듬어 만든 대형 제단이 마련돼 있다. 바로 옆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올라 석불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350년 된 소나무도 자태가 아름답다.
창건 설화 그대로 이 미륵보살입상은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한 작품이다. 미륵불입상 아래 용화보전에서는 행복한 세계를 꿈꾸며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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