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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경주 분황사

2024년 8월 22일

경주의 신라유적이 많은 대릉원을 거쳐 보문단지 쪽으로 가다 보면, 원효대사가 머물며 공부했다는 분황사가 나온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는 곳이라 넓은 들이 열리면서 시원한 경관이 펼쳐지고, 아담한 규모로 한적하게 자리잡아 아늑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분황사 앞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문 앞으로 가면,
주차장입구에 세워진 원효성지 분황사라고 표시한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분황사 정문  아담한 기와지붕 아래에 분황사 현판과 붉은 칠을 한 세 개의 문이 달려 있다. 기와지붕으로 된 붉은 색의 아담한 대문이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이해준다. 정문은 중간 문과 양쪽 문의 3개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걸린 분황사라는 현판의 글씨가 자그맣고 예쁘게 눈에 들어온다.
정문을 들어가면, 그렇게 넓지 않은 절마당이 조용하여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절마당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아담한 기와지붕으로 된 대종각이 있고, 커다란 쇠종이 달려 있다.
절마당의 정면에는 검은 색의 3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예사 절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온 유서갚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있던 곳이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에 강고내말이 구리 307,6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품격을 높였다. 분황사에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년)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구황동 당간지주,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 등의 석조 문화재가 남아 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9층탑이었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  당시는 9층탑이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바닥 기단은 넓직하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씩씩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 있어 눈길을 끈다.
탑신은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렸는데, 1층 몸돌은 거대하고 2층과 3층은 낮게 줄어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탑을 살펴보면 1층 몸돌에는 네 면에 모두 문을 만들고, 양쪽에 불법을 수호한다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아서 매우 인상적이다. 인왕상은 씩씩하면서도 섬세하게 잘 조각되어 있어, 당시 7세기 신라의 조각 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석탑 오른쪽으로 지나면 바로 옆에 원효대사의 비문을 세우는 데 썼다는 화쟁국사비부가 보이는데, 돌의 중간이 네모지게 길게 파여 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연원을 보면 고려 명종이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방치 훼손되어 오다가 추사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此和靜國師之碑趺'라고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고 한다.
석탑 바로 뒤에는 절마당에 돌로 만든 팔각형의 자그마한 우물이 있는데, 석정이라 하여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가장 크고 좋은 우물 유적이라고 한다. 석정은 바위 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고이게 바위를 옴폭하게 파고, 그 위에 다시 시설을 해서 만든 우물의 형태라고 한다. 그러나 이 우물에 조선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부처의 머리들은 경주박물관 옥외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단다.
절마당을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아담한 법당이 나오는데 보광전이라 현판이 붙어 있고, 처마가 낡고 단청이 벗겨진 채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광전 안에는 중생의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입상(보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원래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한다. 1998년에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기록을 발견하였는데,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탔고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몸매도 통통하여 익살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원심보살 사리탑
황룡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시대의 가장 크고 화려했던 절로, 주로 왕족과 귀족들이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황사를 다 둘러보면서 드는 느낌은 신라의 이름난 절임에도 불구하고, 크고 화려하지 않고 아담하고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분황이라는 말에서 선덕여왕의 아름다운 향기로움이 저절로 다가오고,  모전석탑, 석정,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등 유적들도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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